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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딸이 콘택트렌즈가 필요하다기에 동네 렌즈 가게에 들른 참이었다. 렌즈는 처음 사보는데, 대뜸 사축난시인데 재고가 없어 맞춰야 한다고 했다. 사장님의 재빠른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뭘 모르는데 물건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정축은 뭐고, 사축이 뭔지 여쭈었다. 사장님은 아주 찰나에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그때부터 내가 아닌 딸과 눈을 맞추며 개념을 시큰둥하게 설명해 주셨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질문은 내가 했는데, 왜 딸을 보며 대답하는 거지?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건가?' 갑자기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보이는가 싶었고, 이해력 좋은 어린 딸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된 듯했다. 잘못한 일도 딱히 없는데 괜히 심리적으로 위축되었고, 앞으로는 타인에게 뭔가를 섣불리 물어보기가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겪어보니 알 것 같은 나이듦의 서러움

난생처음 느낀 이 황망한 모멸감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고연한 생각들로 뻗어갔다. '수더분하게 입은 차림새가 문제였을까?' '자글한 눈가 주름이 어린 딸과 비교되어 더 맹해 보였나?' 등등. 또래 중년들이 보톡스니 필러니 피부과, 성형외과에 들락거리며 외모를 애지중지 가꾸는 이유가 혹시 나와 같은 경험들의 영향은 아닌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그저 나이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그저 나이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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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은 일격이었다. 그렇잖아도 무릎, 시력, 허리 등 나날이 늘어가는 신체의 노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마음 추스르는 일이 쉽지 않은데 말이다. 마치 사회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때가 되었다는 공식 선언을 받은 것 같아 울적했다. 그런데 이런 수모를 직접 겪은 게 나는 처음이었지만, 주변 어른들에게는 비슷한 일이 이미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70대 중반의 친정 아버지와 허리 수술을 한 병원에 동행한 적이 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중년의 의사가 수술 후 경과와 주의할 점, 병행할 운동 등을 설명을 하는데, 설명 내내 나를 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마치 설명한 걸 왜 또 물어보느냐는 식의 면박에 가까운 응대를 했다. 아버지로서는 몸이 아파 들른 병원에서 또 다른 서러운 상처를 받는 꼴이 아니었나 싶다. 

시부모님도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겪으셨다. 그리고 찾은 자구책은 가능한 한 아들과의 동행이다. 은행이나 시청 같은 관공서 등을 방문하실 때, 거의 예외 없이 남편을 불러 동행하신다. 혹여 남편이 동행하지 못할 때는 남편의 직함을 대면서 본인이 이런이런 아들의 부모라는 말씀을 상대하는 직원들에게 꼭 하신다. 아들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 수시로 맞닥뜨리는 젊은 직원들의 무시를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 성실히 살아온 분들이 사회적으로 받는 대접이 고작 수모와 괄시라니! 행색이 남루하지 않아도,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그저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경시받는 노인이 점점 쉽게 눈에 띄는 것 같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어 피해 갈 것 같지 않기에 노인들이 느끼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더욱 안타까운 건, 노인들의 그 외롭고 상처 받은 허한 마음을 파고들어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다.

노인들의 외로움을 이용하는 사람들

화장지 등을 무료로 나눠주며 의료기 체험 및 판매를 하는 업체들이 있다. 주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판촉행사를 진행하는데, 직원들이 그렇게 상냥하단다. 호기심에 몇 번 방문해보신 시어머니 말씀으로는 그들이 얼마나 싹싹하고 친절한지 자식들보다 더 잘 대해준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웬만해서 받을 수 없는 그들의 호의가 고마워 주머니를 열어 이것저것 구매하다 과소비로 이어졌다는 분들이 많다. 노인분들이 얼마나 사람의 친절과 인정에 목말라 있으면 버젓이 상술인 줄 알면서도 그리 할까 싶어 참 슬퍼진다.

지인의 80대 어머니가 부동산 개발 분양업자의 사탕발림 설명만 듣고 덜컥 계약을 해 버리신 일도 있었다. 동네 거리를 걷다 엉겁결에 종이백 선물을 건네받고는 영업자를 잠깐 따라간 것이 화근이었다. 높은 수익률이 보장된다는 장밋빛 이야기를 혹해서 들으셨단다.

집에 돌아와서야 계약한 땅이 너무 멀고, 잔금 치르기도 만만치 않아 취소하고 싶으셨으나 이미 직원들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분의 아들 며느리가 나서서 수습하느라 몇 달을 고생했다고 들었다. 

늙는다는 건 뭘까? 몸이 자꾸 아픈 것도 신산한 일인데, 타인에게 존중은커녕 이유 없는 수모와 괄시, 이용이나 안 당하면 다행인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돈이라도 있어야 허울뿐인 친절을 살 수 있다. 돈을 많이 낼수록 더 귀한 대접이다. 살면서 그간 쌓아온 경험과 기술, 안목, 식견 등은 다 어디 가고 오직 돈으로 이용당하고 가치가 매겨지는 세상이라니...

노인에게 귀 기울이는 세상
 
   <놀면뭐하니?> 인터뷰에 나오신 오영수 배우님
  <놀면뭐하니?> 인터뷰에 나오신 오영수 배우님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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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 역할을 하신 오영수 배우님이 인터뷰를 하셨다. 희끗희끗한 성긴 머리와 주름진 얼굴로 느릿느릿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전해주셨다. 피할 수 없는 경쟁사회지만 진짜 승자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애써서 어떤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겠냐며, 부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라 당부하시던 그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젊은 진행자도 공감했는지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진행자들이 고개 숙여 악수를 청하며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 또 뭉클했다.

노인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이가 늘 저렇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삶에서 깨달은 지혜를 진중하게 전할 수 있는 노인과 그런 노인에게 귀 기울여 배울 준비가 된 젊은이. 우리네 일상에서 이런 모습들이 영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노인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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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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