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을 연출한 김진열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을 연출한 김진열 감독. ⓒ (주)인디스토리

 
잡지사, 그리고 다큐멘터리 공동 집단인 푸른 영상 소속으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남은 궁금증이 있었다. 여성 빨치산 박순자를 담은 <잊혀진 여전사>(2004),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족에 대한 이야기인 <나쁜 나라>(2015)를 만들 때도 그랬다. 가려지거나 남겨진 사람에 대한 관심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원동력이었고, 곧 개봉을 앞둔 <왕십리 김종분> 또한 그 맥락에 있을 것이다. 

왕십리역 11번 출구 인근 노점에서 30년 넘게 장사하는 김종분씨는 우리가 아는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다. 1991년 5월 25일, 공안 정부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던 김귀정 열사는 백골단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다. 대학생 강경대 열사가 숨진 지 한 달 뒤에 벌어진 일이다. 부지 간에 작은딸을 잃은 김종분씨의 삶은 급변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뒤로 숨는 게 아닌 딸의 생각과 정신을 잇겠다며, 전국을 돌며 숱한 투쟁 현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종분의 김귀정이 되기까지

"자녀를 감옥에 보내거나 잃는다고 모두가 투사가 되는 건 아닐 텐데,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런 궁금증이 있었다. 투쟁 현장에서 만날 때 빼곤 어머님의 삶을 들을 기회가 없으니,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9일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만난 김진열 감독은 처음엔 생애 구술사 형식으로 기획했던 프로젝트가 어떤 과정으로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됐는지부터 전했다. 김귀정 열사의 동문인 현 제작사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 추모사업회가 각각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이었고 김진열 감독의 프로젝트를 이들이 알게 된 이후 함께 만나며 급물살을 탔다.

"곽 대표님이 성균관대 88학번인데 10년 전부터 김귀정 열사에 대한 극영화를 하고 싶어 하셨더라. 추모사업회도 그때 20주기를 앞두고 영상을 준비 중이었다. 저를 포함해 여러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기획안을 받는 과정이 있었다. 그 뒤 따로 연락이 없어서 다른 분이 하시나 보나 싶었다. 가끔 궁금해서 잘 되고 있나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소식을 찾아보곤 했다. 그러다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어머님 기사를 본 거지. 제가 사는 강변역과 가까운 곳이구나.

다큐라는 게 시간과 비용 등 현실적 어려움이 많아서 못하나 싶었다. 지원을 안 받고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한참 고민하다 생애 구술을 생각한 거다. 어머님을 찾아뵈었고,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그러다 곧 30주기니까 같이 영화로 해보자는 제안이 있어 함께 하게 됐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 (주)인디스토리

 
영화는 애초엔 김귀정 열사와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1991년에서 현재로 돌아와야 하는데 사람들이 증언하는 방식만으론 너무 뻔할 것 같더라. 그러다가 어머님이 30년 넘게 노점을 하시며 굳건히 살고 계신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며 감독은 "김종분의 둘째 딸, 김종분 삶 안에 있는 김귀정을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머님의 삶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면 당시 시대 상황이나 아픔을 알 수 있고, 여성으로서 그런 한국사회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는 게 의미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제작사나 추모사업회에서도 이견이 없었다. 무엇보다 성대 동문들이 김귀정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이들 도와주셨다. 그분들 마음에 있는 김귀정, 김종분을 읽을 수 있는 작업이었다. 사실 어머님은 추모사업회나 동문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다며 처음엔 촬영을 부담스러워하셨다. 귀정을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며 설득의 과정이 좀 있었지. 그 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촬영 시작 후에 가끔 가다 불쑥불쑥 전화를 하신다. 밥 먹으러 와! 이러시면 일단 가본다. 허투루 부르시는 게 아니더라. 꼭 누굴 소개해주시고, 연결해주신다. 인근 주민들이 카메라가 계속 세워져 있으니 뭐 하는 거냐 물으시면, '배우가 되려나 보다! 왕십리 김흥국이 아니라 왕십리 김종분이야!' 이러시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주시기도 했다(웃음)."


민주화항쟁 그 이후

<왕십리 김종분>이 특별한 건 아픈 역사와 과거를 제시하며 무거운 현실을 드러내기보단 한 인물의 자연스러운 성격과 태도를 통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을 보인다는 데에 있다. 이웃에게 외상을 흔쾌히 내주고, 주변 상인들이 함께 노점을 봐주는 일상이 영화에 담겨 있는데 저절로 미소가 나오는 장면들이다. 30년 전 돈을 빌렸다가 최근에야 멋쩍어하며 두 배의 이자와 함께 건네는 사내, 매일 노점을 들러 안부를 묻는 중노인 등 여러 군상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어머님은 사실 다 기억하신다. 돈을 빌린 사람 중 누군가는 더 이상 자신의 노점 앞을 지나가지 않는 것도. 다만 그걸 신경 쓰지 않는다더라. 이미 그런 것에서 해탈하신 것 같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삶의 연속이었다. 속으로 '왕십리 말고 제가 사는 동네에도 이런 분이 계셨으면 좋겠다' 싶더라(웃음). 자식만 위해 산 분이 아니라 늘 주변 사람과 함께 살아오신 분이다. 그렇다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나눔의 삶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중년 남성분도 돈을 빌리신 분인데 어머님께선 또 빌려줄 수 있다고 하시더라. 상인들 사이에선 별명이 '술보'인데 제가 막내아들처럼 생각하시라고 그랬다. 보면 늘 밤 11시 노점이 닫을 때쯤 오셔서 정리를 도와주곤 한다. 어머님도 매일 오는 걸 아니까 아예 저녁 식사하면서 그분 음식을 챙겨놓더라. 알고 보니 예전에 노점 맞은편 고시원에서 돈이 없어 쫓겨날 위기였을 때 어머님이 대신 내주셨다더라. 술보 아저씨도 감사함을 알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노점 인근 꽃집 어머님이 그러셨다. 여기에 있으면 굶어 죽진 않는다고."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을 연출한 김진열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을 연출한 김진열 감독. ⓒ (주)인디스토리

 
김진열 감독은 "한국의 어머니라고 하면 가정에 헌신하고 자녀 뒷바라지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김종분 어머님은 그간과는 다른 여성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7남매의 장녀로 큰딸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하셨는데 그런 것에 대한 회한은 전혀 없으셨다"며 김 감독은 "7남매의 자손들까지 어머님 집에 와서 명절에 함께 식사하는 그런 모습에서 어머님이 외롭지 않음을 느끼고 오히려 위로받았다"고 고백했다.

아마 이 영화를 본 관객들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김진열 감독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몇 번의 시사회에서 관객들이 보인 반응 몇 가지를 소개했다.

"어떤 분은 어머님이 1990년대에 연단에서 연설하시는 걸 직접 봤다고 말하면서 영화를 보고 그때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됐다고 하셨다. 20대 관객들은 있는 그대로 할머니의 삶으로 이해하더라. 노점 하는 분들을 이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분의 삶을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더라." 

딸의 죽음 이후 뒤바뀐 삶. 종종 김종분씨는 "작은딸 덕에 영화도 찍어 보고, 민가협 사람들도 알게 됐다. 모든 인연이 딸 덕분에 이어졌다"고 말하곤 한다. 만약 1990년 5월, 김귀정씨가 사망하지 않고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사람이 돼 있을까. 아픈 가정법이지만 김진열 감독에게 물었다.

"동문들에게 그 질문을 제가 여러 번 했다. 그분들도 김귀정 열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게 불과 몇 년 전이었거든. 너무 아픈 과거라 그 이름만 들어도 다들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 맺힌다. 종분 어머님은 딸이 선생님을 하고 싶어했기에 아마 교사가 돼 있을 거라 하셨고, 어떤 동문분은 평범하게 아이를 키우는 주부가 되었을 것인데 아마 시민 단체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강경대 열사도, 김귀정 열사도 그 당시 평범한 학생이자 시민이었으니까." 

뜨거웠던 민주화 운동의 시기를 지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선택을 했다. 시민으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이들도 있지만, 정치인이 된 몇몇 운동권 출신은 오히려 정반대의 노선을 걸으며 당시 정신을 훼손하고 있기도 하다. 이 현실을 두고 김진열 감독은 "저도, 그분들도 모두 당시 희생당한 열사들에게 빚진 사람들"이라며 "성대 동문 중에서도 정치인이 되신 분들이 있잖나. 매년 추모행사에 오시는데 아마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올해까지 김진열 감독은 관객들과 함께 김종분, 김귀정을 읽어내려가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다큐를 하면서 이만큼 행복감을 느낀 게 처음"이라며 새삼 김종분씨와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면을 통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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