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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사당.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돼 있다
 충장사 사당.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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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하나에서 시작된 가을이 만산홍엽을 이루며 파도처럼 밀고 내려와 남녘의 무등산에 오색 물감을 흩뿌려 놓았다. 무등산뿐만 아니다. 동네 공원과 도로, 아파트 단지 등 어디서든 문만 열면 벌어지는 '색(色)의 향연'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몇몇 나무들은 아직 푸르름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계절은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것을 어쩌랴. 혹자는 말한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또 하나의 계절, 늦가을이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고.

광주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치면 많은 사람들은 무등산 '산장 가는 길'을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무등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원효사와 옛 산장 호텔 가는 길에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길은 초겨울까지도 나무들의 가슴앓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무등산 충장사 가는 길의 단풍. 산수동에서 원효사까지 길게 이어진다. 광주 단풍의 일번지라 할 수 있다
 무등산 충장사 가는 길의 단풍. 산수동에서 원효사까지 길게 이어진다. 광주 단풍의 일번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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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단풍의 일번지. 산수동 오거리에서 시작되는 산장 가는 길에는 광주의 옛 성터였던 무진고성지와 충장사, 충민사, 운암서원 등 광주 역사의 원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산수동에서 승용차나 1187번 시내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오색의 단풍길을 돌아 약 20여 분을 달리다 보면 원효사로 올라가는 길과 광주호 호수 생태공원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 이르면 우리는 왼쪽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거기에 억울하게 절명한 젊은 장군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충장사(忠壯祠)'가 있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충장사 전경 1975년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충장사 전경 1975년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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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게 물든 '충장사'의 단풍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 북쪽 자락 이치 마을에 있는 충장사. 광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1567~1596)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학창 시절 소풍 장소로 인기가 좋았던 곳이다. 광주 시내의 중심 번화가 '충장로'도 그를 기리는 도로명이다.

도로명뿐만 아니다. 광주의 어머니산 무등산에도 치마바위·뜀바위·말바위·문바위 등등 장군의 무예와 관련된 전설들이 넘쳐 난다. 후대에 수많은 김덕령의 전설이 만들어진 건 억울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애통하게 죽은 그의 죽음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가을, 충장사의 단풍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넘어선다. 젊은 장군의 피눈물과도 같은 처연함이 배어있다.
  
사당 앞의 단풍나무. 처연하게 물든 단풍은 억울한 장군의 눈물이 아닐까
 사당 앞의 단풍나무. 처연하게 물든 단풍은 억울한 장군의 눈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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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다 못해 핏빛이다
 붉다 못해 핏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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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한 조선이 개국한 지 200년이 되던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2만여 명이 700 여척의 군선에 나눠 타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임진왜란이다. 최신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 앞에 조선의 관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7일. 무능한 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고 조선의 수도 한양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다. 당파싸움만 하던 관료와 관군들은 제 한 목숨 지키기 위해 도망가기 바빴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나라를 구한 건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초들이었다.

4월 22일 경상도 의령에서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의 깃발을 들었고 뒤이어 5월에 호남에서는 고경명 장군을 연합 의병장으로 한 '담양회맹군'이 창설된다. 전라도 광주목 무등산 자락 밑에 자리한 석저촌.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충효마을에서 나고 자랐던 김덕령은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장군의 의병에 합류하여 진군한다.
  
충장사의 외삼문 충용문. 선조가 김덕령 장군에게 내린 군호 ‘충용군(忠勇軍)’에서 따왔다. 옹졸한 군주, 선조는 장군의 ‘충(忠)’을 ‘죽음’으로 되갚았다
 충장사의 외삼문 충용문. 선조가 김덕령 장군에게 내린 군호 ‘충용군(忠勇軍)’에서 따왔다. 옹졸한 군주, 선조는 장군의 ‘충(忠)’을 ‘죽음’으로 되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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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전주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게 된다. 형 덕홍은 덕령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라 한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사이 금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고경명 장군과 함께 형 덕홍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김덕령은 형의 복수를 위해 무등산 원효사 계곡에서 무기를 만들고 왜적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지금도 원효사 계곡 무등산 옛 길에는 장군이 칼과 창을 만들었다는 '제철유적지'와 군사훈련을 했던 '주검동 유적'이 남아 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충성의 대가는 '죽음'

이듬해 1593년 8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모친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 5천을 모았다. 이때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군(忠勇將軍)'이라는 군호를 받는다. 왕세자 광해군은 '호랑이보다 더 날쌔고 용맹하다'는 의미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내린다.
  
충장사의 내삼문 익호문. ‘호랑이보다 더 날쌔고 용맹하다’는 의미로 광해군이 김덕령 장군에게 내린 군호, ‘익호장군(翼虎將軍)’에서 따왔다
 충장사의 내삼문 익호문. ‘호랑이보다 더 날쌔고 용맹하다’는 의미로 광해군이 김덕령 장군에게 내린 군호, ‘익호장군(翼虎將軍)’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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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1월, 충용기와 익호기 깃발을 앞세우고 담양을 떠난 김덕령의 의병은 순창, 남원을 거쳐 함양과 진해, 고성지역을 방어하며 왜군이 호남지방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영남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연합작전으로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군들을 기습하여 격퇴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장문포 해전'에서 수륙 합동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위기가 닥쳤다. 김덕령의 부대에서 군졸 한 명이 탈영한 사건이 발생한다. 탈영병을 잡기 위해 그의 아버지를 잡아들였는데 알고 보니 전라도 체찰사(體察使) 윤근수의 노비였다. 윤근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은 그를 죽음으로 다스렸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윤근수의 모함으로 김덕령은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대신들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재례 용품을 보관하는 동재
 재례 용품을 보관하는 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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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나오는 협문에도 처연한 가을이 내려앉았다
 서재에서 나오는 협문에도 처연한 가을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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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풀려난 지 4개월이 되던 1596년 7월. 김덕령은 운명적인 사건을 맞이 한다. 혼란스러운 전시 상황을 틈타 충청도 홍산에서 서얼 출신의 왕족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력을 키운 반란군들이 청양과 대흥을 함락시키고 덕산까지 점령했다. 도원수 권율로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김덕령은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남원까지 진군했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장계를 받고 진주로 회군하던 중 체포된다. 반란군 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혐의였다. 충청도 체찰사의 종사관 신경행과 한현이 이몽학과 은밀하게 내통을 했었는데 장군을 모함한 세력들은 그 죄를 김덕령에게 뒤집어 씌웠다.
  
김덕령 장군 묘소. 1974년 배재마을 뒷산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오른쪽에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한 형 김덕홍의 묘가 있고 왼쪽에는 동생 김덕보의 묘가 있다. 위쪽에는 조상들의 묘가 있다
 김덕령 장군 묘소. 1974년 배재마을 뒷산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오른쪽에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한 형 김덕홍의 묘가 있고 왼쪽에는 동생 김덕보의 묘가 있다. 위쪽에는 조상들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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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내려다본 충장사 전경
 묘지에서 내려다본 충장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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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한양으로 압송됐다.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옹졸한 군주 선조는 직접 친국에 나섰다. 형틀에 매인 김덕령에게 선조가 묻는다. "어서 역모를 자백하라." 김덕령은 억울함을 말하지 않고 의연하게 답한다. "충효로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

가혹한 심문은 계속됐다. 여섯 번의 심문과 정강이 뼈가 부스러지는 고문 끝에 29살 젊은 장군은 형장에서 숨을 거둔다. 충성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억울하고도 억울한 죽음이었다. 장군은 그때의 억울한 심정을 한 편의 절명시로 남겼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산에 저 불은
끌 물이나 있지만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사당에 봉안돼있는 김덕령 장군의 영정
 사당에 봉안돼있는 김덕령 장군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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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와 당쟁의 희생양이 된 장군의 억울함은 한동안 지속됐고 사후 60여 년이 지난 1661년 현종 때 명예가 회복되었다. 숙종 때 회재 박광옥 선생과 함께 '벽진서원'에 배향됐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조 12년 1788년에 충장(忠壯)이란 시호와 '정려비'가 내려졌다. 장군이 태어난 석저촌을 '충효리'라 부르게 하였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이다.

현재의 충장사는 1975년 건립되었다. 사당에는 장군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돼 있다. 동재와 서재, 은륜비, 충효문과 익호문이 서있다. 유물관에는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발견된 의복과 목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관에는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발견된 의복과 목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관에는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발견된 의복과 목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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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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