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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1976년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조안 켈리는 여성과 르네상스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여성에게도 르네상스가 있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역사의 시대 구분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에 문제의식을 던진다. 농민, 여성, 도시 빈민은 남성 중심의 르네상스에서 배제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양있는 인문학자'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인간형이었다. 그 인문학의 범주에는 미술이 포함되었고, 훌륭한 화가는 훌륭한 인문학자로 여겨졌다. 동시에 그들은 호기심 많은 과학자였다. 이처럼 인문학자이며 과학자, 예술가를 오가는 '천재'들은 전보다 더 존경받는 위치에 올랐다. 오늘날에도 다재다능한 창조적 인간을 '르네상스형 인간'이라 부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중세보다 더 가정에 충실하도록 요구받던 시절이다.
 
주디 시카고, <디너 파티 The Dinner Party>, 1463×1463cm, 복합재료, 1974~1979
 주디 시카고, <디너 파티 The Dinner Party>, 1463×1463cm, 복합재료, 1974~1979
ⓒ Kevin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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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완성된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디너 파티>는 신화와 역사 속 여성 인물을 재기억하는 작품이다. 거대한 삼각형 형태로 만들어진 이 설치 작품은 한 변에 13명씩 모두 39명의 여성을 기린다. 시카고는 이 여성들의 이름을 식탁보 위에 자수로 새겼고, 각각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반영한 39개의 접시를 도자기로 만들었다.

인정받지 못한 가사 노동이었던 바느질을 예술로 보여주는 이 자리는 밥 하다가 사라진 이름 없는 여성들을 위한 디너 파티가 될 수도 있다. 이 디너 파티에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여성 화가로 잘 알려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리스키 외에 르네상스 시대 여성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이사벨라 데스테의 접시가 있다. 그는 누구일까.

르네상스 시대 여성들의 활동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작품에 사인을 한 창작자의 이름 외에 작품을 주문한 사람의 이름도 살펴야 한다. 창작자로서의 활동에는 제한이 있었으나 당시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은 '천재'들을 후원했다. 15세기 이탈리아 여성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테(Isaballa d'Este, 1474-1539)다. 페라라 출신으로 에스테 가문의 맏딸로 태어난 이사벨라는 16세에 만토바의 후작인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와 결혼한다.

피렌체나 밀라노 등에 비하면 작은 도시였던 만토바를 중심으로 데스테는 자신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거대하게 펼쳐나갔다. 다 빈치, 만테냐, 티치아노, 라파엘로, 롬바르도, 미켈란젤로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기에 이름을 새긴 작가들은 작고 크게 데스테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을 생산했다. 데스테는 이들에게 많은 작품을 주문했고, 자신의 초상화도 여럿 남겼다.

그중에서 1536년 완성한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이사벨라 데스테>는 이미 예순이 넘은 데스테의 초상이다. 에스테는 1539년 65세로 사망한다. 그림 속 에스테의 모습은 전혀 60대의 얼굴이 아니다. 티치아노가 에스테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 젊게 그렸을까. 이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복장과 눈빛 등은 에스테의 당시 권력을 잘 암시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이사벨라 데스테 Isabella d'Este>, 102×64cm, 캔버스에 유채, 1534~1536
 티치아노 베첼리오, <이사벨라 데스테 Isabella d"Este>, 102×64cm, 캔버스에 유채, 1534~1536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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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연결하는 '자기만의 방'

남편은 전쟁에 참여하느라 자주 집을 비웠고, 또 한동안 포로로 잡혀있었으며, 일찍 사망했기에 사실상 데스테가 만토바를 거의 통치했다. 여성의 야망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엄청나게 과감하고 전략적이며 지적인 이사벨라 데스테는 '남편 기 죽이는' 여자로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스테는 당대의 많은 시인과 화가 등을 후원하고 뛰어난 외교적 능력으로 신임을 얻었다.

데스테는 많은 편지를 남겼는데 흥미롭게도 평생 서신을 나눈 중요한 관계는 바로 시누이인 엘리자베타 곤차가(Elisabetta Gonzaga, 1471-1526)였다. 곤차가는 르네상스를 후원한 또 다른 여성이다. 그는 이미 우르비노에서 명성이 자자하게 사교 모임을 이끌었고 그의 스튜디올로(studiolo)는 예술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당시 이탈리아 상류층들 사이에서 책이나 그림, 귀한 유물 등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스튜디올로가 유행이었는데, 데스테는 곤차가의 스튜디올로처럼 자기만의 수집과 모임의 장소를 키워냈다.

16세기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던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은 이탈리아 스튜디올로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오늘날 박물관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다. 데스테의 '자기만의 방'인 스튜디올로는 문화적 산실이나 다름없었다. 이 공간에서 데스테는 새로운 작품이나 고고학적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했다. 또한 개인적인 휴식 시간을 갖거나 글을 썼다.

엘리자베타와 이사벨라는 모두 영향력 있는 사교 모임을 이끌며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다져갔다. 여성에게 '인문학자 되기'를 억압했지만 이들이야말로 뛰어난 인문학자이자 인문학의 후원자였다. 남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면 여성들이 적대하는 관계지만, 관점을 바꾸면 여성과 연결된 또 다른 여성이 나타난다.

주디 시카고가 13명씩 삼각형 형태의 테이블에 39명을 모이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와 함께 앉은 열 두 제자, 곧 가장 유명한 만찬인 '최후의 만찬'에 13명이 앉았다. 시카고는 여성이 서로를 바라보도록 삼각형 형태를 만들었다. 여성들이 서로 모이고 바라보고 연결되는 자리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라영 님은 예술사회학 연구자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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