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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 운집한 12만 명의 관중들은 곧이어 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특히 이 베를린올림픽에서는 더 그랬다. 국민들을 선동해 광적인 나치즘으로 몰고 가던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스타디움에 처음 나타난 것은 독일의 아리아인도 아니고 동맹국인 일본인도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작고 깡마르고 머리를 바싹 자른,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표정의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이었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마음엔 태극기를 품었던 손기정의 질주는 단순한 마라톤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고통을 만방에 알리는 항거이자 희망이었다. 손기정이 1등으로 경기장으로 입성할 때 중계하던 장내 아나운서는 외쳤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희망과 기쁨 안긴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역주 끝에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며 1위로 골인하고 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역주 끝에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며 1위로 골인하고 있다.
ⓒ 손기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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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자료


운집한 관중들은 그의 마지막 질주를 숨죽여 지켜봤다. 2시간29분19초의 신기록이었다. 당시에는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섰다. 세계 무대에 알려진 바 없는 동양에서 온 이 작고 과묵한 청년 마라토너는 세계인들뿐만 아니라 아라아 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던 나치마저도 감동하게 했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와 악수하려 했고, 히틀러를 도와 인종주의적인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제작하던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중에 10분 이상을 손기정의 뛰는 모습으로 채웠다.

결승선 통과 후 그는 만세도 하지 않았고 환호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레이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운동화를 벗었을 뿐이었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상의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발로 뛰어 얻은 이 영광이 조국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장기를 가렸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출전이 금지됐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모습. 손기정 선수는 월계관으로 상의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고 남승룡 선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의 모습. 손기정 선수는 월계관으로 상의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고 남승룡 선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 손기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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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본 국적으로 나가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소식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선수를 국제대회에 내보내놓고 기자도 현지에 파견하지 못한 식민지 언론사는 일본 신문으로부터 받은 사진으로 금메달 획득의 낭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것이며, 올림픽 공식 기록에도 일본 국적과 일본 이름 '손기테이'로 기록되어 있다. 살아생전 그는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올림픽위원회가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했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사진 갈무리. 우승한 후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모습.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다는 혐의로 사장 송진우와 이길용 기자가 해직되었다.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했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사진 갈무리. 우승한 후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모습.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다는 혐의로 사장 송진우와 이길용 기자가 해직되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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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다닐 무렵부터 집안이 몰락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서야 했으며, 16세 중국 단둥 회사에 취직한 이후론 차비가 없어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오가야만 했다. 그가 달리기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지만 경비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이중 10번 우승했다. 해방 후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서윤복과 함기용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다.

그의 업적과 명성은 국내 못지않게 해외에서 더 높았다. 미국의 작가 리처드 만델은 그의 저서 '나치 올림픽(The Nazi Olympics)'에서 "손기정 선수는 어려서부터 민족 독립주의자이며 전후(戰後) 조선 독립운동의 리더로서도 공적을 올렸다"고 했다. 또 "베를린에서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 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당시 손은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공식 서명을 할 때는 모두 한글로 썼으며 그 옆에는 조선 지도를 그려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민족의 좌절과 영광이 교차했던 20세기 한국 체육계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다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손기정은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다. 2011년 대한체육회는 그를 초대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했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손기정 선수의 묘.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손기정 선수의 묘.
ⓒ 우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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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태어나 물에서 놀다간 '아시아의 물개'

해남 땅 끝에서 벌거벗고 개헤엄을 치던 아이가 있었다. '한국 수영의 역사'로 남은 조오련이다. 그가 애초부터 수영 선수의 꿈을 키운 건 아니었다. 그는 "워낙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에서 자라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고향에서는 돌파구가 없었다"며 수영선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그는 간판 만드는 집에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수영의 꿈을 키웠다. 회원증까지 몰래 위조해 YMCA 수영장에 다녔다.

조오련은 1969년 6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에 참가했다. 수영복이 없어서 그냥 속옷을 입고 나갔고,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고교부가 아닌 일반부로 출전했다. 그런데도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1위를 휩쓸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나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 1500m에서 거푸 금메달을 따내 사상 최초로 2관왕에 올랐다.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조오련 선수가 수영 사상 최초로 2관왕에 오른 소식을 전하고 있는 조선일보 기사 갈무리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조오련 선수가 수영 사상 최초로 2관왕에 오른 소식을 전하고 있는 조선일보 기사 갈무리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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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에서는 배가 침몰해 300여 명이 사망한 대형사고가 발생한 직후였다. 그는 2관왕의 낭보로 온 국민을 위안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자유형 2관왕(아시아경기대회 2회 연속 2관왕)을 달성했고, 1978년 은퇴할 때까지 50개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수영 발전에 기여했다.

현역 은퇴 후에도 수영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도전 정신과 희망을 심어주는 한편,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1980년 대한해협·1982년 영국 도버해협을 거쳐 2002년에 다시 한 번 대한해협을, 2005년에는 독도를 횡단했으며, 앞서 2003년에는 한강 700리 종주를 성공했고 2008년에는 3·1독립선언문의 33인을 상징하는 의미로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성공했다. 1989년 조오련 수영교실, 1993년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세워 후진 양성에도 주력했으며, 1998년 2월부터는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맡았다.

195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10남매 중 막내였다. 위로 형이 넷, 누나가 다섯 있다. 막내아들이 다섯 번째로 아들을 이어갔다며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오련(五連)이다. 

물에서 태어나 물에서 놀았고, 물에서 자라나 물에서 늙었고, 물에서 마지막 꿈을 풀고 싶었던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2009년 8월 4일 심장마비로 57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20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헌액됐다. 본디 해남에 있는 선산에 안장돼 있었으나 국립묘지안장의결위가 대전현충원 안장을 의결해 2021년 6월 12일부로 이장됐다.
 
스포츠영웅 고 조오련 선수와 그의 부인 김정복 여사의 안장식이 2021년 6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에서 치러지고 있다.
 스포츠영웅 고 조오련 선수와 그의 부인 김정복 여사의 안장식이 2021년 6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에서 치러지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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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박치기왕' 김일

1960년대, 70년대의 한국 프로레슬러로 '김일' 밖에 기억 못하는 사람도 있다. 천규덕과 장영철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지만 김일을 최고로 친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몰락도 김일을 대체할 다른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26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부터 180㎝의 장신과 몸집을 무기로 씨름선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한 잡지를 통해 일본에서 활약하던 재일교포 출신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이야기를 접한 뒤 레슬링의 꿈을 품었다. 1956년 역도산을 찾아 일본으로 밀항하다 붙잡혀 1년간 옥살이를 했고, 1957년 역도산이 보증을 서고 김일을 형무소에서 빼낸 뒤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가 됐다.

1958년 데뷔전을 치른 그는 이후 1963년 세계레슬링협회(WWA) 세계태그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헤비급 챔피언, 1966년 도쿄 올 아시아 태그챔피언, 1967년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30여년간 20여 차례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특히 1960년대 전쟁 이후 극심한 빈곤을 겪던 한국에서 그는 주특기인 박치기로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사람들은 그에게 '박치기왕'이라는 별명을 선물했다. 
 
1966년에 개봉된 ‘극동의 왕자 김일’ 특집 프로그램 광고. 아세아극장과 파고다극장에서 개봉된다는 광고가 각 일간지에 실렸다.
 1966년에 개봉된 ‘극동의 왕자 김일’ 특집 프로그램 광고. 아세아극장과 파고다극장에서 개봉된다는 광고가 각 일간지에 실렸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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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철·천규덕 등과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다 1970년대 중반 현역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일본에서 사업을 펼쳤다. 1987년부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에 힘썼다.

전성기 시절 역도산의 단체 일본 프로레슬링(JWA)에서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젊은 삼총사로 불리는 등 거물로 손꼽혔다. 하지만 스승 역도산이 1963년 시비가 붙은 야쿠자를 두들겨 패다 칼에 찔려 허망하게 사망한 이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국으로 귀국했다.

김일은 세계 프로레슬링계에도 자신의 족적을 제법 남겨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거물로 취급받는 인물이다. 다만, 세계에 족적을 남긴 그 이름은 대개 일본에서 활동하던 당시 명칭인 '오키 긴타로'로 남아있다. 그래도 김일은 일본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도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도 한복을 입고 링에 등장하는 등 한국인 정체성을 세상에 알렸다.
 
챔피언 벨트를 차고 늠름하게 포즈를 취한 김일 선수 생전의 모습.
 챔피언 벨트를 차고 늠름하게 포즈를 취한 김일 선수 생전의 모습.
ⓒ 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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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일본에서 투병생활을 했다. 젊었을 때부터 야구방망이로 맞고, 나무기둥이나 콘크리트 벽 또는 골프 드라이버로도 단련하는 등 단단한 물체에다 대고 허구한 날 연습한 나머지 두개골에 상처가 남는 등 후유증이 컸다는 후문이다.

그는 1995년 4월 2일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은 신일본, 전일본, UWFi, FMW 등 당시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함께 개최한 올스타 흥행인 '꿈의 가교(夢の懸け橋)' 가운데 열렸다.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6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 받았고 사후 2018년 대한체육회의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됐다. 

그는 2006년 8월 만성신부전증 및 심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체육인장으로 치러져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생가 옆에 안장됐으나, 2020년 5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됐다. 스포츠영웅의 국립묘역 안장은 2002년 손기정(육상 마라톤), 2006년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 2019년 서윤복(육상 마라톤), 김성집(역도)에 이어 다섯 번째였다.
 
2020년 5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서 김일 선수의 안장식이 치러지고 있다.
 2020년 5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서 김일 선수의 안장식이 치러지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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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group시민미디어마당 http://omn.kr/group/citizenmedia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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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째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음. 기자-차장-부장-편집부국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음. 현재 인터넷신문 '미디어붓'에서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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