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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숨결이 바람 될 때'
 책 "숨결이 바람 될 때"
ⓒ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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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당연한 명제를 아는 것은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 '내'가 언제 죽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대 수명을 자신의 수명으로 예측하고 살아간다.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 등 인생의 굵직한 사건들도 대부분 미래가 한참 남아 있다고 상정한 상태에서 결정한다. 그렇기에 불쑥 나타난 죽음의 그림자를 목도했을 때의 절망감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가온 죽음은, 이제껏 쌓아온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당연한 듯 미래를 꿈꾸며 산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알려준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음에 무지한 것을 비웃음거리로 삼을 순 없다. 오히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어리석음 속에서 사람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내일도 살리라 기대하고 버티는 마음, 그리고 설사 죽을병에 걸렸더라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법을 다 써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 이것이야말로 '어차피 죽을 거 도대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무력화하는 반증은 아닐까. 삶이 허무하면 허무할수록, 그럼에도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별처럼 반짝인다.

우리는 신체 없이 살 수 없다. 몸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알뜰살뜰 챙기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건강할 땐 건강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말은 아무리 외워두어도 정말 건강할 땐 머릿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방문 목적이 검진이든 치료이든 병원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움츠러든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자신이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이리라.

의사와 환자의 경계에서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가 쓴 책 <숨결이 바람이 될 때>에 언급된 환자들의 사례를 보면 한 가지 서글픈 사실이 명확히 떠오른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서야 자신의 몸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름도 난해한 병명과 그보다 더 난해한 치료 과정을 듣고 나면 환자는 생전 처음 오는 영토에 뚝 떨어진 이방인이 되고 만다. 생전 처음 보는 의사에게 오롯이 내 몸을 맡기고 그의 전문적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몸의 주인인 '나'를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가 기대 이상으로 소명의식이 투철하기를 바란다. 최선을 다할 것을 알면서도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생략할 수가 없다.

의사도 사람이다. 환자 입장에서 그래서 편안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다. 하필 내 진료를 볼 때 실수하면 어쩌지? 유난히 피곤해보이시는데 지금 날 제대로 진찰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 의사가 아무리 소명의식을 갖추었다하더라도 결국 의사도 직업 아닌가. 과로에 시달릴 것이고 일찍 퇴근하기를 바랄 것이다. 냉정히 말해서 자신을 기다리는 환자는 모두 일감일 테니까.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한 예시로 폴과 대학원 동기인 마리는 몇 주 동안 쪽잠을 자며 야간 근무를 한 뒤, 아홉 시간이 드는 수술에 보조로 참여하는데 내심 '너무 피곤해. 하느님 제발, 전이가 있게 해주세요.' 바랐다고 한다.

암이 광범위하게 전이되었다면 수술이 무용지물이라서 취소되기 때문이다. 마리는 자신의 바라던 결과가 나오자 처음엔 안도했지만, 곧이어 깊은 괴로움과 수치심에 시달렸다. 그리고 수술실을 뛰쳐나와 울다가 폴을 만나 위와 같은 일을 고해했다.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분투'다. 환자가 병과 맞서는 것도 분투이고, 의사가 현실적인 조건에 맞서 소명을 지키는 것도 분투이다. 실제로 (문학 소양이 상당한) 작가는 책 속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어놓았다. '몇 년 전, 나는 다윈과 니체가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을 규정짓는 특징은 생존을 향한 분투라는 것이다. 삶을 이와 다르게 설명하는 건 줄무늬 없는 호랑이를 그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속속들이 다 알 순 없더라도 의사도 분명 환자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단순히 그것이 업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에게 당신의 싸움이 절대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폴은 의사의 의무를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라 적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대신해서 병과 싸워주고 고통을 대신 겪어줄 수 없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싸움이 있다. 그래서 폴에게 병원은 직장 그 이상이었고 환자는 일감으로 치환되지 않았다.

그는 첫 번째 환자의 죽음을 겪고 나서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위중한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그 병명이 곧 그 환자의 이름을 대신하는 건 아니다. 병은 우리의 인생 계획을 망가뜨릴 뿐이지 인생 자체를 앗아갈 순 없다.

폴은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자신이 폐암에 걸린 사실을 확인한다. 그는 '의사에서 환자로, 주체에서 객체로, 주어에서 직접 목적어'로 옮겨갔다. 그렇다고 후자의 삶이 전자의 삶보다 가치 없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을 때에도 끝까지 기권을 외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카플란 마이어의 생존분석 곡선은 시간 경과에 따른 생존 환자의 수를 보여주는 통계이다. 그곳에는 오로지 숫자만 있다. 하지만 폴은 환자에게 힘을 주는 건 명확한 숫자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환자가 된 후에도 그는 생존 곡선의 무용함을 깨닫는다. 컴퓨터의 삶이라면 모를까 인생을 모조리 숫자로 설명할 순 없다.

그래서 서류로 남은 수많은 환자들의 데이터보다 폴이라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경험을 담은 이 글이 우리의 삶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해준다. 폴은 이 책에서 숫자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로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이야말로 그 어떠한 통계보다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전해줄 것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흐름출판(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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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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