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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어딘가 모르게 늦된 아이였다. 가령, 한 번도 빼어나게 공부를 잘해 본 적도 없으면서 당연히 서울대에 갈 줄로 알았다. 친구들과 대화해 보니 간혹 그런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한 모양인데,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서야 정신을 차렸으니 아무래도 늦긴 늦은 듯하다. 

그런 나라서 철 없이 품은 꿈이 있었으니,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소설을 읽는 것만큼 나를 홀리는 일은 없었기에 그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전공을 정할 때도, 취업을 할 때도, 상황에 맞춰가며 소설과는 무관한 것들을 택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내 글의 양분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사업계획서나 공문을 쓰면서도 희열을 느낄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글과는 무관한 일을 더 많이 하며 돈을 벌었고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넓게 보면 더없이 불성실했다. 생계에는 꿈을, 꿈에는 생계를 핑계 대며 어느 한쪽에도 온몸을 담그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돌아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냈을 때, 나는 소위 뼈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나에게는 소설을 쓸 재능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내가 그 작업을 눈곱만큼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소설을 사랑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을 쓰는 것은 내게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꿈 

한때는 철도 없고, 눈치도 없는 내가 답답했다. 학창 시절부터 정신을 좀 차렸으면 어땠을까. 꿈 운운하며 딴생각에 빠져 지내지 말고 보다 촘촘한 스펙을 준비하고 전문직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나는 꿈 덕분에 행복했고 나를 위로하는 법을 찾았다.

호프집과 동대문 옷 시장을 전전하며 새벽까지 일해야 했던 대학 시절에도, 어딘가 모르게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직장 생활에서도, 나를 버티게 한 것은 꿈이었다. 물론 돈 걱정 없이 꿈을 향해 다가가거나 매운맛이라도 일찍 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건 겪어보지 않은 일이다. 내가 겪은 것은, 꿈은 존재만으로도 아늑한 위안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꿈 예찬론자다. 보다 체계적이고 확실한 단계를 밟아가며 꿈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기가 죽기도 하지만, 사는 모양은 다 제각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라는 꿈은 접었지만 나는 여전히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글을 쓰며 나를 위로한다. 어설펐던 꿈 덕분에, 그 위로법을 배웠다. 

아주 가끔은, 나를 위로하려고 쓴 글이 다른 이에게도 울림을 주었다는 댓글을 받기도 한다. 그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박한 글을 쓰며 살고 싶다. 수정되어 온 꿈 덕분에, 나는 우울한 순간에도 빠져나올 수 있는 틈을 찾는다. 나를 구한 꿈이니, 찬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애매한 재능>책표지
 <애매한 재능>책표지
ⓒ 어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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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자랑할 것도 없어서 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꿈. 이 모든 것을 고백하게 된 것은 수미 작가의 <애매한 재능> 때문이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한 문장마다 우르르 따라 나오는 생각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했다. 

그러니 '애매한 재능'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타인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씨앗을 심어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나의 경험들을 떠올렸지만, 그녀의 고군분투는 결코 어설프지 않았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무언가 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책에는 창작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고민이 가득하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에도 예술을 꿈꿔도 되는지, 작가로 성공하려면 타향살이를 계속해야 하는지, 육아를 하면서도 꿈을 계속 가져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과연 재능이 있는지 끝없이 고민한 흔적들이 시리고, 또 따스하게 펼쳐진다. 

청년이 꿈을 가져도 되는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먹먹하다. 재능의 크고 작음을 떠나, 현실 앞에서 타협해가며 지워져 간 꿈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니 청년이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바라게 되었고, 나아가 모두가 꿈꿀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게 되었다. 
 
"큰 사명감을 가지고 무엇인가 크게 잃어가며 꾸는 꿈이 아니라 가볍고 재밌게, 어른이 되어서도 꿈을 꿀 순 없을까?" (180쪽)

그 꿈이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그녀 말마따나 마음 맞는 동네 친구를 찾는 것이어도, 외국어를 배워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어도 좋다. 그 무엇이든 내게 힘찬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면, 그보다 소중한 자산은 찾기 힘들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내가 가진 그릇이 작고 겸손해 보일지 모른다. 더 큰 그릇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더 좋은 것을 담아야 한다고 성화를 부릴 수도 있다. 지금 나는 세상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가진 그릇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연습 중이다. 비로소 '무언가 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스스로에게서 거둘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205쪽)

책의 서두는 "검색해도 안 나오는 작가"라는 겸손한 말이었지만, 책의 말미에는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그 선언이 내 어깨까지도 쫙 펴주었으니, 나는 저자의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게걸스럽게 읽을 것을 꿈꾼다. 그전까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이들과 이 책을 나누고 싶다.

애매한 재능 -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엇도 될 수 없는

수미 (지은이), 어떤책(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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