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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이는 7년 동안 백혈병을 앓았고 지난 6월 9일 킴리아 치료를 기다리다 열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은찬이는 7년 동안 백혈병을 앓았고 지난 6월 9일 킴리아 치료를 기다리다 열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이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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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월 십오일 목요일입니다."

은찬이는 입원하기 전날 온 힘을 다해 한 줄의 문장을 완성했다. 눈이 거의 안 보이는 상태에서 문장 하나 완성하고 기쁘게 웃었다. 엄마 이보연씨는 아이가 글자를 꾹꾹 눌러쓰는 것을 보고 있으니 얼어붙었던 희망이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은찬이는 지난 4월 15일 입원 후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은찬이는 여섯 살이던 2014년 11월 13일, 원인 모를 멍이 생기고 무릎이 아파 계단 오르기도 힘들다고 호소한 날 새벽, 응급실에 갔다. 은찬이를 검사한 후 의료진들은 분주해졌고 분위기는 갑자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B세포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처음에는 성장기에 있을 수 있는 통증이라고 생각했어요. 응급실에 갈 때만 해도 백혈병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의료진들은 가장 치료하기 쉬운 백혈병이라며 2년 반 동안 표준항암치료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표준항암치료를 쉬운 치료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모범적일 수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순탄하게 진행됐다. 그러니 2017년 여름, 병이 재발했다는 진단은 말 그대로 날벼락같았다.

"은찬이는 일곱 살 때부터 이미 항암 부작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요. 감추는 부모님들도 계시지만 저희는 은찬이 성격을 고려해서 알려주고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이식을 받은 후에 혹시 재발해도 치료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은찬이도 그렇게 알고 있었죠."

2020년 2월, 세 번째로 재발했을 때는 중국에 가서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방법까지 알아보고 준비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하늘 길이 막혔고 은찬이와 가족들의 소망도 갈 곳을 잃었다. 그해 8월에 첨단재생바이오법이 시행되면 신약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환자 맞춤형 카티(CAR-T) 치료제인 킴리아(Kymriah, 성분명 티사젠렉류셀). 주치의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했다.

열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은찬이

"유일한 희망이라는데 어느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요. 당장 대출도 알아보고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는지 알아봤죠. 저희 가족 조건에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없었고 대출로는 킴리아 치료비를 대기에 역부족이었어요. 결국 집을 팔 수밖에 없었어요."

어렵게 돈을 마련한다고 해도 킴리아 치료를 받으려면 아이의 상태가 좋아져야 했다. 그러려면 다른 항암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 은찬이는 뇌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황에서 의식을 잃었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체력도 아니었다.

"은찬이가 의식이 없이 중환자실에 있을 때 인사나 하려고 들어간 적이 있었어요. 제가 귀에 대고 '은찬아, 엄마 왔어'라고 했더니 정말 영화에서처럼 눈을 번쩍 뜨면서 은찬이가 '엄마' 하는 거예요. 그렇게 깨어나서 한 달을 또렷한 상태로 있었어요. 평소처럼 대화도 많이 하고 정신이 명료한 것 같아서 '이 시기만 버티자'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니 은찬이가 가족들에게 선물한 시간이었나 봐요."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을 때 킴리아 치료를 아직 못했다는 말을 듣고 은찬이는 하루 종일 실망한 표정으로 지냈다. 당시에 두통으로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2021년 6월 9일 새벽에는 달랐다.

편안한 표정으로 자는 모습을 보니 이보연씨는 "그저 좋았다". 새벽에 검사를 하고 난 후 의료진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은찬이는 자는 게 아니라 의식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었다. 그 후로는 움직이지도, 깨어나지도 못했고, 하루 반나절 가족들이 곁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열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은찬이가 그렇게 가고 저는 오래도록 생각했어요. 은찬이는 저보다 훌륭한 사람인데 그런 은찬이가 떠나고 내가 남은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은찬이의 소명이 뭘까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은찬이가 제때 킴리아 치료를 받고 만일 살아있다면"
 
은찬이 엄마 이보연씨는 킴리아의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와 생명과 직결된 신약의 건강보험 신속등재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과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은찬이 엄마 이보연씨는 킴리아의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와 생명과 직결된 신약의 건강보험 신속등재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과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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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연씨가 생각하는 소명은 이런 일이 이 땅에서 또다시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킴리아와 같은 치료제를 제때 쓸 수 있도록 청와대 국민청원을 넣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진정서를 제출하고 국정감사에 나가 변화를 촉구하는 일이었다.

킴리아는 평생 한 번 맞는 주사약이지만 수억 원을 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고가의 약제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식약처 시판 허가가 지난 3월 5일 이루어졌지만, 그저 허가만 났을 뿐 건강보험 등재를 위해서는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4억 6천만 원이라는 고가의 치료비도 문제다. 미국에서는 5억 원, 일본에서는 3억 5천만 원에 약가가 정해졌고, 일본에서는 허가 후 바로 건강보험이 적용돼 환자 본인 부담금은 몇백만 원으로 낮아졌다.

"은찬이가 제때 킴리아 치료를 받고 만일 살아 있다면 킴리아를 건강보험에 등재해 달라고 하는 활동을 했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 은찬이가 이 자리에 있었을 거예요."

이보연씨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아픈 일을 자꾸 떠올려야 하는 요즘 상황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다고 느낀다. "나라가 어떻게 다 해주냐"며 무턱대고 비난을 받아야 하는 상황도 견딜만한 일이 된다.

"한 사람 살리는 값이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반대 의견도, 국가의 재정 파탄을 우려하는 마음도 헤아려야겠지만, 국민의 생사가 오로지 개인과 그 가족의 몫이라면 국가의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제도는 단지 한 걸음 진보하는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다.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에 집중해야 할 때다.
 
▲ 킴리아의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를 촉구하는 은찬이 엄마 이보연 씨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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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킴리아, #은찬이, #건강보험, #백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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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노동자.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으나 암 진단을 받은 후 2022년 <아프지만, 살아야겠어>, 2023년 <나의 낯선 친구들>(공저)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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