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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10일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무장단체 의열단이 창립한 날이다. 그러나 2015년에야 의열단 초기 단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정면을 응시하는 김원봉과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정이소, 김익상 등 7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그것이다. 이들은 어디에 잠들었을까? 의열단 창립 102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가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했다.[편집자말]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1920년 3월께로 추정되는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들의 모습. 사진 속 마지막 줄 오른쪽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중간에 앉은 이가 정이소. 오른쪽 하단에 따로 붙은 사람이 김익상이다. 사진에서 붉은색 표시한 인물이 곽재기.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1920년 3월께로 추정되는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들의 모습. 사진 속 마지막 줄 오른쪽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중간에 앉은 이가 정이소. 오른쪽 하단에 따로 붙은 사람이 김익상이다. 사진에서 붉은색 표시한 인물이 곽재기.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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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48번에 안장된 애국지사 곽재기. 2015년 8월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이 쓴 논문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1920년 3월의 사진 속 의열단원들 중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에 유해가 모셔진 인물이다. 

잘 알려졌듯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사진 속 가장 우측에 선 인물)은 친일경찰 출신 등쌀에 못 이겨 1948년 북으로 이동한 뒤 1958년을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사진 속 좌측 끝에 서 있는 이성우와 우측 하단에 따로 붙은 김익상은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위패에 이름 석자만 올렸다. 굵은 선이 돋보이는 사진 속 좌측 두 번째 선 인물인 김기득은 서훈은 받았으나 유해가 어디에 모셔졌는지 기록이 없다. 서훈을 받지 못한 강세우와 정이소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열단원 7인 중 왜 곽재기만 유일하게 현충원에 안장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해방 후에도 다른 의열단 단원들에 비해 모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살다 떠났기 때문이다. 1952년 1월 한국전쟁 중 사망한 곽재기는 1963년 독립유공자를 인정받은 뒤 1968년 9월 서울현충원에 잠들었다. 

맹렬히 의를 실천한다 했지만...

곽재기, 1919년 11월 10일 중국 길림에서 의열단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김원봉, 이성우, 강세우, 윤세주, 이종암, 신철휴 등과 함께한 인물이다. 이들은 '맹렬히 정의를 실천한다'는 의열단의 이름처럼, 일제에 맞서기 위해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지향했다. 

그 시작점에 곽재기가 있었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1893년 2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1907년 교사가 된 후 1909년부터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후 1919년 3월 청주 일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해 구금됐다. 1919년 7월 만주 길림으로 이동해 (김원봉 고모부인) 조선독립군정사 소속 황상규를 만나 작탄투쟁을 위한 청년결사대 조직에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을 모색했고, 10월에 김원봉이 규합해온 신흥무관학교 출신 청년들과 합숙하며 폭탄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여 부단장이 됐다.

1919년 12월 곽재기는 김원봉, 이성우, 이종암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제1차 거사를 위한 폭탄 16개와 권총 2정, 탄환 100발 등 무기류를 구입해 국내로 밀반입했다. 1920년 3월 밀입국하여 밀양으로 가서 신철휴, 윤세주, 한봉근을 투탄결행 요원으로 지명했다. 이후 서울 공평동 전동여관에 거처를 잡고 지휘소로 삼았다. 하지만 1920년 6월, 거사를 실행하기 직전 밀정에 의해 모든 계획이 탄로난다. 1920년 6월 20일 서울에서 이성우와 윤세주가 경찰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곽재기 역시 보름 뒤인 7월 5일 부산에서 체포됐다. 

의열단의 강령에 따라 조선총독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다는 의열단원 곽재기의 원대한 계획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정신이상'이 만든 비극
 
1921년 6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의열단원 곽재기 재판과 관련된 기사. 가운데 앉은 곽재기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사진 속 붉은 원.
 1921년 6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의열단원 곽재기 재판과 관련된 기사. 가운데 앉은 곽재기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사진 속 붉은 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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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기는 이후 감옥에서 7년여의 시간을 보낸다.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곽재기의 의연한 모습이 엿보이는 기록이 있다.

1921년 6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곽재기의 모습이다. 곽재기는 안광이 쏟아질 듯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곽재기를 심문하는데 피고는 흰 두루마기에 금테 안경을 쓰고 항상 벙글 다다(많이) 웃으며 재판장 앞에 나섰다"라고 묘사했다. 체포 후 11개월이 지났지만 곽재기는 고초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고 당당하게 임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거사를 행하지 못했던 곽재기는 일본인 재판장에 의해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에 갇혔다. 그리고 1927년 1월 22일, 곽재기는 마포형무소에서 출감한다. 당시 신문에 검은색 두루마기에 세련된 안경테를 걸친 출감 당시 곽재기의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이후에 펼쳐진 곽재기의 삶은 여느 독립운동가의 말로처럼 비극의 연속이었다. 곽재기는 출옥 후 김시현, 이육사, 윤세주, 류시태 등 다른 의열단원처럼 독립의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실제 옥을 나온 뒤 자리잡은 충남 연기군 서면 지역에서 1930년대 초 청년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재판정에서조차 여유 있는 미소를 띠었지만 오랜 투옥과 고문으로 '정신이상'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곽재기의 정신이상 증세는 아내에게 영향을 끼쳤다. 곽재기는 자신의 증세 등을 이유로 아내에게 끊임없이 이혼을 강요했다. 부인은 남편의 정신이상 증세를 알고 이혼을 거부했다. 그러나 정신이상 증세는 의처증으로 이어졌고, 아내가 처남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외간남자와 정을 나눈다 오인해 부인에게 면도칼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내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곽재기는 그길로 경찰에 자수했다.

1932년 9월 신문에는 "이십여 년 전 밀양폭탄사건에 관련돼 감옥생활을 하다가 만기 출옥한 후로 정신에 이상이 생긴 곽재기가 그의 아내에게 발작된 정신의 이상으로 그와 같은 참혹한 행동을 한 듯하다"라고 기록됐다. 이후 곽재기는 12년 형을 받아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1952년 1월 10일 전쟁의 와중에 곽재기는 충북 괴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8년 9월 서울현충원에 '애국지사 곽재기의 묘'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그의 무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잃었던 조국, 잃었던 조국 땅, 태양도 달도 별들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조국의 운명은 고대하던 조국의 광복 그날은 찾아왔다. 그런데 이 아픔 웬 말이냐. 조국의 분단은 언제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다.
 
현충원에 잠든 의열단원 곽재기의 묘
 현충원에 잠든 의열단원 곽재기의 묘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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