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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하기시 쇼카 손주쿠와 가까이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옛집과 토쿄에서 옮겨 지은 별저를 방문할 수 있었다. 별저는 동경에서 살던 집을 옛집 옆에 옮겨 재현시킨 건물로 현재, 이토 히로부미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쇼카 손주쿠에 다닐 때 거주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집
 쇼카 손주쿠에 다닐 때 거주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집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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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한일 간의 평가의 차이를 통해, 어떻게 일본에서 혐한의식이 조장되어 왔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지금의 야마구찌현 동남부에서 농부의 아들(林利助)로 태어났는데, 부(林十蔵)가 조슈번의 하급무사(足軽) 이토 집안에 들어가면서, 부자가 함께 이토로 개명하여 하급무사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으로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를 개항하게 되는데, 조슈번은 시모다 가까이 사가미만(相模湾)의 연안경비를 분담하게 된다. 1856년 열여섯살 이토는 조슈번의 연안경비를 맡은 상사 구루하라 료조(來原良蔵)의 부하로 인연을 맺는데, 구루하라의 소개로 쇼카 손주쿠에 입교하게 된다.

이토는 18살에 쇼카 손주쿠에서 배울 기회를 얻었다. 손주쿠는 신분에 상관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숙생들 간에는 보이지 않는 구별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 이토는 다다미 교실에 입실하지도 못한 채 밖에서 서성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했다.

여기서 다시 구루하라의 소개로 여덟살 선배인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부하가 된다. 요시다 쇼인과 더불어 구루하라와 다카스기와의 만남이 이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후 1863년5월 조슈번의 지시를 받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할 수 있었는데, 이듬해 3월 시모노세끼 전쟁으로 조슈번이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다.

훗날 조슈번이 사쓰마번과 함께 막부를 무너뜨린 다음, 메이지정부에서 관료로 승승장구한 이토는 구미를 방문하면서, 화폐금융제도와 헌법 등 서양문물과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그가 이후 일본에서 선각자로 주목받게 되는 이유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한일의 상반된 평가 

여기서는 한반도와 관련해 이토에 대한 평가에 주목하기로 한다. 이렇게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면서 선진화를 일군 정치가인데, 왜 한국에서는 평가가 낮은가라는 일본 측의 불만이다. 일본에서 조선정책과 관련해 이토를 평가할 때, 실시하는 방법과 적용시키는 대상과 범위는 일본과 다르지만, 이토가 조선에서도 이러한 선진화된 제도와 문물을 이식시키려고 했던 점에 주목해 보려고 한다.

그는 일본의 생존과 안전보장을 위해서 대륙과 연결되는 접점이 되는 조선을 확보한다는 목표보다는, 조선에 근대화된 제도를 이식시키려 했다는 점을 강조했던 측면도 있다. 조선에서도 메이지유신 후 일본의 근대화에 주목하면서 일본을 통해 선진문물을 조선에 이식하려 한 친일파 엘리트들이 등장했지만, 이들의 노력과도 등가(等価)로 매기면서 평가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날까지 지속하는 한국과 일본 간에 식민지지배를 둘러싼 인식의 차가 나타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등 5명이 영국유학을 출발했다는 기념비, 신야마구치역
 이토 히로부미 등 5명이 영국유학을 출발했다는 기념비, 신야마구치역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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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를 포함한 쇼카 손주쿠 출신 숙생들의 사고는, 구미열강을 대처하기에 미숙하게 보인 앙샹 레짐인 막부를 조슈가 사쓰마와 함께 무너뜨린 자신들이 조선에서도 구체제인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동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였다.

일본의 조선침략 정당화 논리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조선이 다른 외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는 적어도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이유로 자리잡아 왔다.
 
토쿄에서 옮겨온 이토의 별저
 토쿄에서 옮겨온 이토의 별저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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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토가 수상으로 재임 중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 10월)에 대해, 한국에서 제기된 이토와의 관련설을 부정하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桜)가 주도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일본에서 혐한의식이 확대되는 배경에는 이토를 비롯한 유신기 정치가들에 대한 평가가 한국에서는 낮다는 비판에서 시작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구미로부터 수용한 선진문화의 제도와 문물을 조선에도 이식시키려 한 것인데, 이를 당시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침략으로 규정짓고 있다는 데에 대한 불만이다.

조선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막대한 피해와 희생에 대한 언급은 거의 무시하는 수준이다. 현대사에서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은 조선식민지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데, 이에 대해서도 외면하다시피 한다.

이토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암살당하기 전, 이토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1909년 4월까지 조선에 자치를 적용시키려 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암살당하기 전, 1909년 4월에 다달아야 이토는 조선병합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토는 조선자치론을 견지해왔고 처음부터 무력을 배경으로 직접통치로 조선을 병합하려 했던 강경론자보다는 낫지 않는가라는 반론이다.

하얼빈에서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당했을 때, 일본에서 조선에 대한 불신과 반감은 극에 달한다. 이토는 주위에 누가 저격을 했냐고 물어보고, 한국청년이었다는 답을 듣자 '빠가야로'라고 외쳤다고 알려져있다. 이토가 암살당한 후, 조선병합은 같은 손주쿠 동문이며, 조슈 출신인 야마가타(山縣有朋)와 데라우치(寺内正毅)가 이어받아 주도한다.

이토의 별저에 걸려있는 약력에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소개되어 있다. 적에 대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단순한 의미의 테러리스트보다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의해 응징당했다는 것은, 일본과 이토에게도 더 절실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본다.
첨부파일
GBW-27 (21-11-8).d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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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혐한 , #지한,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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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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