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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학교가 폭력으로 시끌시끌하다는 뜻, 시(詩)로 학교를 끌어당기거나 끌어준다는 뜻, 결국에는 좋은 의미에서 학교가 시끌시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이 학교폭력 예방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려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기자말]
요즘 학생들이 쓰는 언어를 급식체라고 부른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는데 깜짝 놀랐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전적인 의미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급식체(給食體)
주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하기 방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예를 들어 의미적으로는 관련이 없지만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연이어 쓴다거나, 초성만 사용하여 말하는 방식 따위가 있다.

급식체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될 만큼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가보다. 사실 유튜브 방송뿐만 아니라, 다수의 케이블, 지상파 방송에서도 출연진의 대화와 자막 속에 급식체 표현이 종종 나온다. 방송에서 시작된 표현이 학생들에게 유입된 것일까? 아니면 학생들이 쓰는 표현을 방송에서 가져다 쓴 것일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서로 영향 관계에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방송가에 이런 말들이 퍼지면 퍼질수록 학생들의 급식체 문화는 더 당연시될 것만 같다. 자유롭게 방송을 하고 있는 어떤 유튜버는 활용 언어의 거의 50프로 이상이 급식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튜브를 달고 사는 요즘 학생들의 언어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

급식체가 끌고 다니는 욕설, 패드립, 성드립

요즘의 급식체를 걱정하는 것은 언어가 사람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언어로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결국 실제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급식체는 욕설과 패드립, 성드립과 자연스럽게 만나거나, 그것들을 앞뒤로 끌고 다닌다. 일종의 대장 격이다. 학생들이 자주 쓰는 급식체의 사례를 찾아보았다.

1. 개이득
'많이'라는 뜻의 접두사 '개-'와 이득이 합쳐져서, '아주 큰 이득', '아주 크게 이득을 보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뜻하지 않았던 이득이라는 의미도 부여되어 있다.

2.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와 '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다'는 뜻의 표준어 '오지다'에, '똥이나 오줌을 참지 못하고 조금 싸다'라는 뜻의 표준어 '지리다'를 합친 뒤에, 겨울왕국의 흥행 덕분에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린 '렛잇고'까지 붙은 급식체다. 이 세 단어가 합쳐지면 어떤 뜻이 되는 걸까? 사실 정확한 뜻을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문맥상으로 어림짐작해보면 무언가 대단한 것, 놀랄 만한 상황을 감탄사처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연결어미 '-고'가 반복되는 리듬과 어감이 재미있다는 점을 추가할 수도 있겠다. 대다수 급식체로 쓰인 어떤 글에서는 이 구문이 어떤 추임새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3. 에바참치
게임 유저들이 "야, 이 참치 에바야."라고 시작한 말에서 유래해 '에바참치'라는 급식체가 탄생했다. 에러(error)와 오버를 합친 '에바'와 참치가 붙은 말로서 매우 오버스러운 상황을 이야기할 때, 나에게 과도한 일이 주어지거나 어려운 상황이 생겼을 때 쓰는 용어이다. 라임을 맞추기 위해 '에바참치꽁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금요일인데 수행평가만 다섯 개 있을 때, 수업이 바뀌어서 하루에 수학 수업이 세 번 들었을 때 '완전 에바'라고 할 수 있다.

         -<급식체 사전>, '10대들의 언어로 소통하고 세상 보기' 中에서
 
4. 앙기모띠
이 말은 내가 중학교에서 수업 중에 실제로 학생들이 작성한 글 속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계속해서 "앙기모띠 선생님, 앙기모띠 글쓰기" 이런 식으로 글을 작성하는 바람에 내가 애를 먹었다. 왜 그런 말을 쓰느냐고 막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내가 그 신조어의 뜻을 몰랐다. 찾아보니, '앙 기모찌'의 변형이라고 한다. 일본어의 '기분 좋다'라는 뜻의 단어를 유투버들이 자주 쓰면서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5. 엠창
엠창을 찍을 때는 엠창이라고 외치며 검지, 중지, 약지를 접고 엄지와 소지로 엄지는 입에(이때 살짝 혀를 내밀어서 엄지 끝에 침을 묻혀야 한다), 소지는 눈썹 사이 미간에 닿게 해야 하며 접은 손가락은 코에 닿으면 안 된다. 몇몇 지역에서는 결백을 의심하는 사람이 오른손 검지와 엄지 끝을 붙여 동그란 고리를 만들면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 고리를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끊으면 된다. 이게 대체 어디서 온 제스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저 제스처가 '이게 거짓말이면 우리 엄마는 창녀다'라는 뜻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째서인지 남고생이나 남중생, 심하면 남초등학생들에게도 퍼져 있는 일종의 인증 행위로도 쓰인다. 처음에는 엄창으로 쓰이기 시작하였지만, 전설모음화를 거쳐 엠창으로 변형되어 더 자주 쓰인다. 뭔가의 사실을 말했을 때 그것의 진실성을 보증한답시고 하는 행위로써 내가 말한 게 진실이 아니면 우리 엄마가 창녀라는 사회적 손가락질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순화하자면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 패드립을 하는 행위이지만 이걸 하는 학생들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이 행위를 한다.

                     - 나무위키, '이게 거짓말이면 우리 엄마는 창녀다' 中에서
 
위에서 언급한 급식체는 정말 일부에 불과하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양의 급식체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어서 걱정이 앞선다. 접두어 '개'나 '씹' 같은 말이 모든 단어에 붙어버린다. 그럼 그 말은 앞서 말한 대로 일상어를 넘어서 욕설이나, 패드립, 성드립이 되어버린다. 학생들이 이런 말들을 일상어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 블로그에서 아이디 '날아라그랑조'를 쓰는 어떤 분은 이렇게 해석하기도 했다.
"하나의 메시지를 다양한 형태의 언어유희로 연결하면서 메시지 중심이 아닌 상대방과의 연결을 끊지 않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소통이라는 것의 본질은 메시지의 명확함인지 연결성의 유지인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중략) 급식체는 '소통의 도구로 여겨졌던 언어를 소통의 대상 자체로 끌어올리면서 언어 자체를 재구성하고 파편화하여 전달이 아닌 언어의 연결을 통한 상대방과의 연결 자체에 중점을 두는 언어사용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중앙일보> [e글중심]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ㅇㅈ" 급식체…언어 파괴인가 中에서
 
그런데 위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급식체가 요즘 세대들 간의 소통과 연결이라는 효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문제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급식체가 '급식충'의 언어 개념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급식충도 수많은 급식체 중에 하나인데, 이 비속어를 잘 들여다보면 급식체가 학생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급식충은 '급식을 먹는 학생 + 벌레(충)'의 합성어다. 급식을 먹는 학생을 벌레로 보는 이 관점은 단순히 그들만의 언어생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언어생활은 곧 한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으로 연결된다. 급식충이란 말에는 자학과 자조, 그리고 혐오와 폭력의 시선이 들어가 있다. 급식은 학교나 교육이란 개념과도 연결된다. 그러니까 급식충이란 말은, '학교충'이나 '교육충'이란 말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가 있고, 그것은 결국 청소년기의 학생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육의 장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발생시킨다.

'충'이 어디든 붙어 비하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거기서 파생되는 부정적인 정서는 결국 학교구성원 모두에게로 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춘기의 학생들이 섬세한 언어를 구사한다면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 정서를 체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급식체로 이루어진 폭력적인 언어생활에 방치된 학생들은 어떤 정서를 가지게 될까? 그들의 정서가 획일적으로,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 쉽게 굳어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강연 중에 실제로 접한 요즘 학생들의 말, 말, 말

말은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한 학생의 언어습관은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영향을 준다. 말을 조리 있게 하려고 노력하는 학생에게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는 일이 예의범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전달될 말의 성격을 고려해서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일은 품이 들어가는 일이고, 생각보다 애를 써야 하는 일이다.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고민하는 데서 한 인간의 사회성이 길러진다고 믿는다. 물론 교양 있게 말하면서도 폭력적인 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어가 가진 힘을 믿는 편이다.
 
중학교 강연 모습. 화이트보드에는 학생들의 '요즘' 고민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학생들의 언어가 가득했다.
 중학교 강연 모습. 화이트보드에는 학생들의 "요즘" 고민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학생들의 언어가 가득했다.
ⓒ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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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대강당에서 학생들과 스포큰워드의 언어로 소통했던 적이 있다. 공연과 강연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시간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학생들을 한꺼번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학생들에게 요즘 고민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고민이 들어간 메모지를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부착했다. 요즘 중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강연을 듣고 난 후 마음의 변화가 있었을까. 학생들의 언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학교 현장의 생동감을 담아낸 몇 개의 고민들을 소개해본다. 공감도 되고 미소 짓게 되는 말들이었다.
 
1. 급식이 너무 맛없어요!
2. 14년을 살아봤는데, 삶이 너무 고달파서 걱정이에요.
3. 공부하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되고, 요즘 친구들이랑 너무 많이 싸워서 힘들어요. 싸운 친구들이랑 화해하고 싶고, 다시 잘 지내고 싶어요.
4. 내 얼굴이 너무 예쁨. 하지만 남친이 안 생김.
5. 우리는 살아가는가. 죽어가는가.
6. 유치원 때 약혼한 남자를 못 찾아서 고민입니다, ㅠㅠ
7. 공부가 왜 있는지, 고민이에요.
 
마음이 아픈 말들도 있었다. 학생들이 생각보다 "죽고 싶다"는 표현을 많이 썼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마음을 언어화할 정도라면, 마음은 이미 곪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메모지는 익명으로 제출된 것이었기에 어떤 학생의 마음이었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죽고 싶다'는 언어 앞에는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부사가 놓여 있었다. '그냥'이라는 말이었다. '그냥 죽고 싶다'는 말이 그날 왜 그렇게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학생들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마주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귀찮다"는 말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귀찮은 마음이 결국 죽고 싶다는 말로 귀결되어버린 것일까. 학교가 폐허가 되면 좋겠다고, 원자폭탄이 떨어지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언어도 있었다.
 
사진 속의 언어들을, 요즘 학생들의 내면 상태라고 확대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마음(생각)과 함께 다닌다. 학생들이 써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면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사진 속의 언어들을, 요즘 학생들의 내면 상태라고 확대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마음(생각)과 함께 다닌다. 학생들이 써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면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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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언어들도 섞여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올 수 없는 언어들이 거기 있었다. 아예 언급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었다. 그날, 거기에도 급식체의 불편함을 상회하는 욕설, 패드립, 성드립이 존재했다. 어떻게 그런 언어를 공유할 수 있을까. 요즘 학생들은 이렇게도 솔직하구나.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것을 정말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언어들은 솔직함을 가장하여, 우리 모두에게 무례했던 것은 아닐까.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예의 없는 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도 예의도 없는 언어들 사이에서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한 가지의 언어가 있었다. 학교폭력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언어였다. 명백한 SOS 신호였다. '제발'이라는 말이 그 문장 끝에 붙어 있었다. 간절했던 그 구조 요청의 말은 왜 그때까지 누군가에게 온전히 닿지 못하고,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을까? 무기명으로 전달된 한 학생의 현실이었다. 어둠 속에 갇힌 어떤 학생의 간절한 생존 신호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볼까? 수십 번을 고민했다. 이미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대강당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그 고민의 언어가 정말 사실이었다면, 그 학생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날 이후에 어떤 희망을 발견했을까. 누군가 가까스로 그 학생의 손을 잡아주었을까? 너무 심심하다는 말과 너무 죽고 싶다는 말 사이에서 간절하게 떨고 있는 말, 여전히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 급식체에 가려져 있던 학생들의 간절한 언어가 우리의 삶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학교를 나오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까 그 메모지, 차라리 악동들의 장난이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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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없는 학교를 소망합니다. 제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학교에서 낭독합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들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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