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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쾌속 진격'을 거듭해왔던 일본군은, 1942년 여름 이후 연합군의 본격적인 반격에 직면했다. 그해 6월 초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과 순양함 1척을 잃으며 대패했고, 8월 7일부터 시작된 과달카날 전투 역시 극심한 전력 손실만을 남긴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공세의 입장에 있던 일본군은 이제 명백하게 수세, 아니 열세로 몰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남태평양 전선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 지도부)은 중국 전선의 병력들까지 차출해 앞으로 다가올 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하고자 했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에 위치한 부건빌 섬 역시 연합군 견제를 위한 요충지로 여겨져 육군 제23연대를 주축으로 한 중국 전선의 병력들이 투입됐다.

"살아있는 송장...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몇 차례의 패배가 있긴 했지만 그 실상이 국민들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던 때, 개전 초기의 승전보에 취해 있던 23연대 장병들은 자신만만했다. 그들은 당시에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과달카날로 가서 연합군을 섬멸한 뒤, 오스트레일리아나 미 서부해안에 상륙할 것이라 믿으며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한 곳은 과달카날에서 500km 떨어진 부건빌 섬이었다.

23연대가 상륙하기에 앞서, 부건빌 섬에는 과달카날 전투의 패잔병들이 먼저 들어와 전열을 추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반년 간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연합군과의 격전을 감내해온 이들이었다. 과달카날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서 부건빌 섬으로 철수해온 패잔병들의 모습은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살아있는 송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새 군복을 입혔지만, 옷깃에서부터 뻗어 있는 목덜미는 왜 그리 얇은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만큼은 청황색 빛을 띠며 부어올라 있었다." - 츠노다 후사코, 1987, <책임, 라바울의 장군 이마무라 히토시>, 신조문고

승전의 희망에 부풀어 있던 23연대 장병들에게 있어, 과달카날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의 모습은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고난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았으리라. 그러나 23연대 장병들이 당혹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한 진지구축 작업이 시작됐다. 가혹한 정글 환경과 고된 노동 속에서 병사들 사이의 불안감은 서서히 커져갔다.

"쥐 한 마리라도 살려두지 않을 듯이 맹사격을..."
  
연합군은 함포사격, 지상에서의 포격, 공중에서의 공습 등 다방면에서의 화력전개로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 부건빌 상륙 당시 함포사격을 벌이는 미 해군의 경순양함 콜롬비아 연합군은 함포사격, 지상에서의 포격, 공중에서의 공습 등 다방면에서의 화력전개로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 U.S.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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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1일, 마침내 연합군이 부건빌 섬에 상륙했다. 연합군이 부건빌 섬에 상륙할 것을 내다보고 병력을 증원했던 대본영의 판단은 적중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륙지점이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이 부건빌 섬의 남쪽 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내다보고 섬의 남부지역에서 방비를 굳히고 있었지만, 정작 연합군은 일본군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섬 중앙부의 타로키나에 상륙했던 것. 섬 중앙부를 수비하던 중대급 규모의 일본군 병력은 순식간에 궤멸되고 말았다.

연합군은 상륙하자마자, 일본군으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불도저 등의 중장비를 동원해 비행장 건설에 착수했다. 부건빌에 연합군의 비행장이 마련되면, 남태평양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라바울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부건빌 수비대 사령부는 23연대에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사령부에서는 추후 섬 남부에 또 다른 상륙전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했기에, 수비병력의 주력은 그대로 보존하기로 하고 23연대만 출동시켜 섬 중앙부의 연합군에 대응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23연대가 연합군을 축출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다.

연합군은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체계와 정보력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23연대는 진군을 시작한 지 이틀만에 연합군의 맹렬한 포격과 공습 앞에 기세가 갑자기 꺾이고 말았다. 23연대의 생존 장병들은 이때 '포탄이 스콜(폭우)과 같이 쏟아졌다'고 회고한다. 이때 이미 병력의 6분의 1이 쓰러지고 말았다. 23연대장 하마노우에 토시아키(濱之上俊秋) 대좌는 당시의 절망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적은 쥐 한 마리라도 살려두지 않을 듯이 맹사격을 거듭하고 있다. 적탄과 우리를 비교하면 150 대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23연대의 식량과 탄약도 바닥을 드러냈다. 23연대는 전투불능의 상태로 치달았지만, 사령부로부터는 그 어떤 지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대본영은 절대국방권을 설정하면서 절대국방권 밖에 있던 도서 지역들을 사실상 포기했는데, 부건빌 섬 역시 절대국방권 밖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대본영은 부건빌 수비대 사령부에 '극력을 다해 지구전을 펼치라'는 지침만을 남겼다. 더 이상 본국에서 부건빌 섬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현장의 판단에 따라 알아서 살아서 싸우라는 뜻이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부건빌 수비대 사령부는 추후에 벌어질 결전을 염두에 두고서 23연대를 사실상 방치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연대장이 내린 중대 결심
  
탄약 등의 물자를 소모한 일본군 병력들은 수류탄과 총검, 군도 등을 들고 돌격했지만 전차 등의 중화기로 단단히 무장한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 부건빌 섬 전투 당시, 일본군의 돌격에 맞서 교전하는 미군 탄약 등의 물자를 소모한 일본군 병력들은 수류탄과 총검, 군도 등을 들고 돌격했지만 전차 등의 중화기로 단단히 무장한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 U.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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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서도, 지역 사령부에서도 완전히 버려진 23연대에서는 끔찍한 아비규환이 연출됐다. 기력을 다한 병사,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결국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전선이 붕괴되고 연대가 전멸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하마노우에 연대장은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것은 전투라기보다 학살에 가까운 일이다. (이대로는) 결국 전멸하고 마는 것은 필연. 어쩔 수 없다. 한 웅큼의 부끄러움을 참고서 적의 사정거리 너머로 부대를 이동시켜 재공격을 준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전투다운 전투마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라리 병력을 물려 재정비하는 것이 낫다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마노우에 연대장의 당번병이었던 고노 교죠(小野行助)씨는 당시 하마노우에 연대장이 남긴 말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연대장님이 '이렇게 부대를, 천황 폐하의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말씀하시며 '후퇴하자'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마노우에 연대장은 자신이 지휘하던 23연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지역 사령부와 대본영에 항명하면서까지 병력을 후퇴시켰다. 이후 그는 비겁자로서 군 내부의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고, 보직해임되어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 장병들을 살리기 위해 항명을 감수했던 하마노우에 연대장 하마노우에 연대장은 자신이 지휘하던 23연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지역 사령부와 대본영에 항명하면서까지 병력을 후퇴시켰다. 이후 그는 비겁자로서 군 내부의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고, 보직해임되어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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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마노우에 연대장의 합리적 판단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사령부에서 급하게 달려온 작전참모는 하마노우에 연대장을 꾸짖으며 전선사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하마노우에 연대장은 "탁상공론은 집어치우라"고 맞서며 불복했다. 결국 23연대는 하마노우에 연대장의 고집으로 전선에서 4km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충격의 여파는 대본영에까지 미치게 됐다.

대본영 참모들은 앞다퉈 하마노우에 연대장의 비겁함을 성토했다. '적의 포화가 맹렬해서 어쩔 수 없다는 연대장의 언동에 분개한다' '설사 전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리고 폐하의 적자(赤子)를 죽게 한다 해도 감투정신을 견지해서 공격해야 한다' '공격정신에 금이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난들이 쏟아졌다. 결국 하마노우에 연대장은 보직해임돼 일본으로 소환됐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현장 부대의 지휘를 맡지 못했다.

남겨진 연대 병력은 부건빌 수비대 전 병력과 함께 재차 총공격에 투입됐지만, 연합군 전력이 3배 이상 보강된 상황에서 이들의 돌격은 그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미한 희생이 누적돼 갔다. 결국 1944년 3월 25일에 이르러서야 사령부는 섬 중앙부에 대한 공격작전을 단념하고 소규모 제대 단위의 지구전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가망 없는 공격작전이 중지된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그렇다고 부건빌 섬 장병들의 고난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변의 전우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져 가는 가운데, 일본군 장병들은 잡아먹을 쥐나 벌레를 찾아 정글 구석구석을 헤맸다.

그 와중에 섬 남부로 향하는 연합군의 진격에는 더욱 속도가 붙었다. 포로가 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됐으므로 병사들은 전사든 아사든 병사든 자살이든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23연대 장병들이 부건빌에 상륙했을 당시 마주했던 과달카날 패잔병들의 악몽이 다시금 부건빌 섬에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항복선언, 버림받은 장병들에겐 '축복'과 같았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와도 만날 수가 없어서... 어쨌든 일본이 그리웠어...  먹고 싶구나, 만나고 싶구나... 입에는 담을 수 없었지. 말한다면 '수치'가 되니까..."
▲ 23연대 소속으로 부건빌 섬 전투에 참전했던 오키 아츠시 씨(2010년 인터뷰)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와도 만날 수가 없어서... 어쨌든 일본이 그리웠어... 먹고 싶구나, 만나고 싶구나... 입에는 담을 수 없었지. 말한다면 "수치"가 되니까..."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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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일본군 장병들에게, 1945년 8월의 항복선언은 그야말로 축복과 같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연합군에 의해 뿌려지는 '삐라'를 받아 들고서, 그들은 울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까지 살아남아서 종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부건빌 섬의 전체 일본군 7만 중 4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특히 23연대의 경우 6000여 명 중 400여 명만이 살아남아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군복 입은 청년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신념으로 부건빌의 정글에 들어가 싸웠다. 그러나 나라는 그들을 버렸다. 부건빌 섬에서 죽어간 청년들의 목숨은 단 한 번도 전쟁 지도부에 의해 고려되지 못했다.

보다 못한 현장 지휘관이 부대를 후퇴시켜 이들의 목숨을 보존하려 했을 때, 나라에서는 이를 비겁함으로 규정하고 징벌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끝에 겨우 전쟁이 끝났지만, 대본영의 그 누구도 이들의 희생에 대해 사죄하는 일은 없었다. 남은 것은, 살아남은 청년들의 눈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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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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