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6 19:35최종 업데이트 21.11.0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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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감독 김진열, 그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정일건·이수정과 함께 영상기록단을 꾸렸다. 팽목항과 안산, 국회와 광화문광장을 오가며, 세월호 특별법제정을 위한 가족들의 투쟁을 카메라에 담았다. 1년여 동안 찍은 분량이 무려 500시간이 넘었다.

김진열은 이 영상들을 편집해 영화 <나쁜나라>를 만들었고 2015년 12월 3일에 첫 상영을 했다. 하지만 세월호를 외면하는 분위기 탓에 확보한 개봉관이 겨우 16개였고 상영일 수마저 짧았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다이빙벨> <그날 바다> 등과 함께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고 독립영화계에 '김진열'이라는 이름을 또렷히 새겼다.


김진열은 <나쁜 나라>가 개봉관에서 내려온 후 후속 작업을 미룰 수 없다며 또 안산을 오가기 시작했다.

"촬영을 마치고 서울 상계동 집으로 가는데 전철 창문에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어요. 잠자리에서 꿈을 꾸면 바다에 갇힌 세월호 안에서 제가 어머니들이랑 수를 놓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꿈이라는 걸 내 자신이 알고 있는 거예요."
 

다큐 20년 차 김진열 감독 모두 6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 민병래

 
김진열이 다시 카메라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유가족들 하고야 비교할 수 없지만 2년 동안 현장을 지켰던 그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가족들과 동료들은 심리치료를 받으며 잠시 쉬기를 권했고 그는 마지못해 작업을 중단했다.

"제가 유가족이어도 누군가 활동을 계속 기록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한번 멈춘 게 화근이었어요. 뭔가 갖춰서 설명도 못 드린지라 가족들 뵐 낯이 없었어요. 얼마 전 안산에 갔다가 예기치 않게 가족분들을 만났어요. 제가 당황하고 허둥대니 어머님들이 우리가 만난 세월이 벌써 7년이 넘어요 하시는 거예요. 어려운 현장에서 나눴던 감정들이 전해오면서 위로가 되더라구요."

김진열은 <나쁜 나라> 이후를 기록하는 카메라를 다시 들지는 못했다. 가족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안고 산 세월이었다.

기자에서 다큐멘트리스트로 전직을 하다

김진열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기자로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월드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대표로부터 기사분석과 기획기사 작성을 배우며 수습과 동시에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후 격주간지 <시사뉴스>에서 사회부, 문화부 생활을 거쳤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낮에 취재를 하고 밤에는 뜨거운 물에 발을 담궈 피로를 풀면서 글을 썼다. 힘들어도 즐거웠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 인터뷰하며 나눈 얘기를 앵무새처럼 옮긴다는 답답함이 있었다. 2주 동안 취재를 하고 마감을 지으면 금세 마감이 돌아와 무언가 쫒기고 고갈되는 것 같았다.

그때 김진열은 KBS에서 정수웅 감독의 다큐 <압록강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진열은 불현듯 긴 호흡의 다큐에 사로잡혔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신문방송학과에 편입했고 학과 내에 있는 다큐동아리에 들어갔다.

김진열이 동아리 활동을 하며 만든 첫 작품은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 장애인잡지 <함께 걸음>을 취재하면서 만났던 김진옥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어 오빠가 사준 6미리 카메라로 그녀의 결혼부터 출산까지를 기록했다.

두 번째는 여성 빨치산 박순자의 일생을 다룬 <잊혀진 여전사>. 스물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분단의 아픔을 다루는 작업이라 부담이 컸다. 그는 '여성전사'이면서 '여성 전쟁의 역사'라는 의미로 박순자의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김진열이 어린 나이에 작품을 두 편이나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클 래비거 덕분이었다. 그는 <다큐멘터리>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하는 게" 다큐멘터리스트의 요건이라고 말했다. 김진열은 이 구절 하나만을 믿고 뛰어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를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마음을 얻기 전까지는 섣불리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이는 결혼이주민을 다룰 때나 세월호를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진열은 줄곧 이런 마음과 태도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다.

왕십리 김종분을 만나다

김진열 감독이 세월호의 아픔에서 벗어나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된 계기는 2019년 <오마이뉴스>에서 "내 이름은 김종분, 91년에 죽은 성대 김귀정이 엄마여"를 읽고서였다.

[관련 기사 : 내 이름은 김종분, 91년에 죽은 성대 김귀정이 엄마여]
http://omn.kr/1rfv2

김진열은 다큐멘터리스트로 살아오면서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나 민주화 운동의 유족들을 기록하고픈 꿈이 있었다. <나쁜 나라>를 만들면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많이 만났던 터라, 그 아픔을 30여 년이나 안고 살아온 김종분의 마음살이며 왕십리 행당시장 앞에서 노점상을 해 온 그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김진열은 김귀정의 극영화를 추진하던 인디스토리의 곽용수 대표와 김종분의 노점을 찾아갔다. 마침 김귀정추모사업회에서도 2021년 30주기를 앞두고 추모영화를 기획하던 중이었기에 이야기는 급진전됐다.

김진열이 처음 생각했던 <구술생애사>를 뛰어넘어 다큐영화 <왕십리 김종분>을 만들기로 했다. 2021년 5월 25일 30주기에 맞춰 최소한 시사회라도 연다는 일정까지 정해지니 마음이 바빴다.

"종분 어머니는 3남매를 키우기 위해 30년 이상 노점일을 해오셨어요. 어머니의 어머니도 종로에서 노점일을 하셨구요. 종분 어머니의 인생이 너무 힘든 삶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딸의 죽음, 부검을 둘러싼 영안실 내에서의 대치, 그리고 장례식. 평생 노점 일만 해오신 종분 어머니가 헤쳐가기엔 너무 큰 시련이었어요. 그래도 어머닌 버텨내셨고 지금도 왕십리를 지키고 계세요. 이런 모습을 단원고 어머니들에게도 들려줬지요. 다들 놀라워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말들 하셨어요."

김진열의 말대로 김종분은 사별한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되었고 청량리 미주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등짐까지 지어 날랐던 장한 엄마고 강한 여자였다. 91년 5월 25일, 치마를 입고 나가다 돌아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나갔던 딸이 다쳤다는 소식에 백병원으로 달려갔건만, 영안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딸의 주검을 만났던 김종분, 왜 딸이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고마웠던 건 딸의 친구들. 일 년에 세 번씩 30여 년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준 친구들 덕에 김종분은 슬픔을 삭히고 버텨내며 왕십리 노점을 지켜낼 수 있었다.

김진열은 그런 김종분의 삶을 2020년 5월부터 따뜻한 영상으로 그려냈다. 귀정이를 잃고서, 싸우는 엄마로 투쟁하는 여성으로 거듭나는 장면을 뜨겁게 되살려냈다. 고맙게도 동문들과 텀블벅 후원을 통해 제작비가 8000만 원이나 모금되어 촬영현장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제 11월 11일이면 <왕십리 김종분>은 독립영화관 30개를 포함 전국의 복합상영관에서 세상을 만나게 된다.
 

왕십리 김종분의 영화 포스터 김종분의 김귀정의 어머니다 ⓒ 민병래

 
독립 다큐 20년간 여섯 개의 작품을 만들다

1974년생으로 다큐인생 20년인 김진열에게 세상은 작은 상들을 내려주었다. 2004년에는 <잊혀진 여전사>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신문상'을 2015년에는 <나쁜 나라>로 '레드어워드'상을 받았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왕십리 김종분>이 다큐경쟁부문 와이드앵글로 상영되었고 영화진흥위원회의 2021년 하반기 개봉 지원 작품에도 선정되었다.

의미가 있는 상과 지원이지만 외롭고 고단했던 다큐멘터리스트의 길을 보상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나누는 고급정보가 "어떤 알바가 꿀 알바다" 하는 얘기일 정도로 독립 다큐에 몸 담았던 김진열의 삶은 비탈길이었다.

다큐의 길을 걸은 이래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은 스스로 해결했고 언제나 반실업 상태였지만 한 번도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다. 그 흔한 자동차 하나 없어 오직 두 발로만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어느새 삼각대를 메고 다니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 
 

다큐 20년의 김진열 감독 모두 6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 민병래

 
김진열, 그는 한때 "주제의식을 제대로 빚어낸 그리고 담론도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가치와 목표에 집착하니 어깨가 얼어붙어 쉽게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기획도 붕 뜨기 일쑤였다. 소중한 시간이 마구 흘러갔다.

"어느 순간 그냥 놔버렸어요. 그러면서 생각이 가벼워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내가 이해하고 해석하는 만큼 기록하자, 다만 꾸준히 하자라고 마음을 정리했어요."

그러면서 김진열은 인물을 바라보는 눈도 깊어지고 주제를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가 만든 여섯 번째 작품 <왕십리 김종분>을 깊은 가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노란빛 찬연한 은행나무길로 인도할까? 뱀눈처럼 차가운 빗길로 이끌고 갈까? 아무렴 어떠하겠는가. 102분 동안 이어지는 이 다큐에 김종분의 바위같은 삶이 있고, 30년의 세월을 딛고 부활한 귀정이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있으니.

<못 다한 이야기>

1926년에 정지용이 발표한 시 <카페 프란스> 3연에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글 마지막 문단의 "뱀눈처럼 차가운 빗길로 이끌고 갈까?"라는 구절은 위 글귀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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