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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벽화
 해녀 벽화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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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따라 걷는 제16코스

제주올레를 만들면서 롤모델로 삼았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걷다보면 몇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800km 정도 되는 거리를 한 번에 완주하려는 사람(거의 한 달 걸린다)과 걷고 싶은 구간만 걷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걸어서 완주하려는 순례자이다. 후자인 경우는 지리적 접근성이 좋은 유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시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휴가를 걷는 데에 기꺼이 투자한다.

나또한 제주 올레를 걸을 때 지리적 접근성의 용이함(?)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코스를 이어나갔다. 2020년 12월 30일부터 2021년 1월 4일까지 제1차 걷기를 시작으로 2월 5일부터 2월 15일까지는 제2차, 제3차는 10월 1일부터 10월 3일까지였다. 아직 완주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올레를 걷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이동성'이다. 이동성은 시간과 함께 한다. 시간은 장소를 담고, 장소 안에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걷는다는 것은 사람과 장소와 시간과의 관계 맺기 즉, 상호교류의 장이 아닌가 싶다.
 
바람 부는 16코스 신엄해안
 바람 부는 16코스 신엄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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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코스 단애산책로
 16코스 단애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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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의 기억, 고내포구에서 걷기 시작하여 옛날부터 바위가 험하여 다니기 어려웠다는 신엄리 바닷가에서 잠시 멈췄다. 유독 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위치한 앙증맞은 등대가 위협적인 파도 속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나도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낮추어야 했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올레꾼들 기운이 더 강했으니까 말이다.

마침내 소금빌레가 펼쳐진 구엄포구를 지나서 중산간 방향으로 들어섰다. 구엄마을을 지나 수산봉을 오를 때부터는 비교적 순해진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산등성이가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 덕이다. 김통정 장군과 삼별초대원들이 여몽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웠다는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왜 슬픈 역사만 제주도에 흔적을 남겨야 했는지,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눈이 시린 애달픔들을 바람결에 날리면서 걷다보니 광령1리 사무실(종점)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한 계절을 건너뛰고 하늘이 시퍼렇게 무르익은 10월 1일 나는 다시 광령1리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비우면 채워지는 걷기
  
용연다리에서 본 풍경
 용연다리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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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를 시작할 때 제17코스부터 걷는 사람들이 많다. 제주공항에서 바로 시작하는 코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주시와 가깝기 때문이다. 광령1리 사무소에서 시작해서 관덕정이 있는 제주올레 공식안내소가 제17코스 시작점이자 종점이다. 제법 인기 있는 포인트가 그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계절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여름을 건너뛰고 다시 걸었던 10월 1일에는 유달리 길 위의 장소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광령1리 사무소에 도착해서 광령교를 건너고 무수천 틈새길로 들어섰을 때 나는 알았다. 그동안 묵은 때가 벗겨져서 온몸의 근육들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복잡한 인간사의 근심을 없애준다는 무수천의 영향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수량이 풍부해서 제주시의 주요 수원이기도 한, 한라산 장구목 서복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25km를 흘러 외도동 앞바다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외도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외도 월대와 마주친다. 어두운 밤, 고고하게 모습을 드러낼 달빛을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낮 동안의 풍경만으로도 명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백 년 세월을 이겨낸 팽나무와 소나무가 강을 향해 휘늘어져 있어서 그 가지에 살짝 낮달이 앉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이호테우의 아마추어 서퍼들
 이호테우의 아마추어 서퍼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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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 월대가 근엄한 노년의 분위기를 풍긴다면 이호테우 해변은 젊은이들의 장소였다. 누대 주위에서 공공근로 조끼를 입고 청소를 하는 어르신들 사이를 빠져나와 부지런히 걷다보면 바당올레 끝에 체육공원을 낀 언덕에 올라서게 된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망망대해 바다를 훑으면 방파제 끝에 있는, 흡사 트로이의 목마 같은 이색적인 빨강·하양 조랑말 등대를 볼 수가 있다. 드디어 이호테우해변에 도착한 것이다.

제주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이기도 한 이호테우는 '이호동'과 '테우'가 합쳐져서 불리게 되었다. 거무스름한 모래와 자갈로 덮여 있는 해변 너머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하얀 포말에 보드를 타고 있는 아마추어 서퍼들의 몸놀림에서는 역동성을, 공들인 피크닉 세트에 앉아서 서퍼들을 보고 있는 커플의 뒷모습에서는 나른한 평화를 엿보았다.

상이한 두 세계가 공존하는 이호테우, 전통놀이를 하는 실물크기 어린이 조형물이 있는 넓고 번화한 모두추억애거리, 횟집들이 늘어서있는 도두항 구름다리를 건너면 도두봉에 이른다. 부지런히 걷다보면 어두워지기 전에 용두암과 용언다리 그리고 관덕정을 지나 간세라운지가 있는 관덕정분식에 도착할 것이다.

걷는 동안 수많은 장소들을 지나고 장소 안의 사람들을 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하는 풍경들과 마주하고 마주한다. 걷는다는 것은 풍경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내 것을 비웠을 때야 제대로 된 풍광이 안으로 들어오니 많이 비울수록 새것을 더 채울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 비우면 꽉 차는 그 단순한 진리를 걸으면서 알게 되었으니 걷는다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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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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