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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병을 예방하거나 고쳐 건강한 삶을 영위하려는 욕구는 인간 본성에 가장 충실한 행위다. 바로 의료(醫療)다. 조선 한양에는 한의학 바탕의 4개 국립의료기관이 있었다. 궁궐에서 왕과 왕족의 병을 고치던 내의원(內醫院), 궁에 필요한 약재 공급은 물론 의학교육을 담당하며 필요에 따라 관료를 치료하던 전의감(典醫監), 민중의 병을 치료하던 혜민서(惠民署)와 역병·전염병 등의 예방과 치료를 전담하던 활인서(活人署)다.
 
1908년 세워진 대한의원 본관. 현재는 의학역사문화원 등으로 사용 중임.
▲ 대한의원 본관 1908년 세워진 대한의원 본관. 현재는 의학역사문화원 등으로 사용 중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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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12월 고종은 이 중 혜민서와 활인서를 폐지해 버린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시급히 서양의학을 도입할 재원 확보가 목표이고, 다른 하나는 재정압박 등을 이유로 민중들 치료를 포기하려는 의도였는지 여부다. 이즈음 고종이 묄렌도르프에게 서양병원과 의학교 설립계획 수립을 지시한 점으로 미루어, 전자가 우세해 보인다.

국립의료원 제중원

1885년 국립의료원 제중원이 설립된다. 제중원이 통설처럼 갑신정변 '때문에' 설립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조선은 1870년대부터 급진개화파 주도로 서양의학 도입 논의가 활발했다. 따라서 서양식 국립의료기관 설립은 시간문제일 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홍영식 가옥(현 헌법재판소)에서 개원한 제중원의 1885년 당시 모습.
▲ 개원 당시 제중원(1885)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홍영식 가옥(현 헌법재판소)에서 개원한 제중원의 1885년 당시 모습.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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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보여준 치료 효과와 그의 병원 설립 제안이 촉매제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여기에 정변 때 목숨을 잃은 홍영식의 2천㎡ 규모 가옥(현 헌법재판소)이 사용 가능했다는 물적 기반도 한몫한다. 알렌은 헌신적으로 일한다. 1887년부터 제중원 의사들은 50원의 월봉을 받게 된다.

조선은 서양의료기관 운영 능력은 물론 의학교육에 필요한 인재와 재정마저 부족하다. 관리주체인 외아문(外衙門)은 부득이 제중원 운영을 제3자에게 맡겨야 하는 처지다. 이에 자연스럽게 알렌 중심의 북장로 선교회가 제중원 '운영권'을 맡게 된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에 매년 약 3천 원의 운영비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설립 1년 후 825㎡를 확장하여 의학당을 짓고 학생 16명을 입학시키나, 끝내 졸업생은 배출하지 못한다. 그해 7월 2차 확장을 통해 '여성전용병동'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는 모두 북장로회 요청에 의한 것으로, 확장 비용으로 3천 원이 소요되었다. 이때 이르러 제중원은 2850㎡의 완성형 서양의료기관으로 면모를 갖춰 나간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뒤인 8월, 의아한 일이 벌어진다.

알렌이 후보지로 남별궁 터를 지목하며, 갑자기 병원 이전을 요구한 것이다. 여러 이유를 들었으나, 민중을 진료하기에 북촌 재동은 부적합하다는 명분이다. 고종은 남별궁 터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구리개(구 외환은행 본점)에 병원 터를 마련해 준다.

터는 약 6천㎡(최대 16.6천㎡)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 1887년 초 구리개로 제중원 이전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1894년까지 제중원 운영은 원활하지 못해 사실상 약국 수준에 불과하다. 설상가상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침범(갑오왜란)을 기화로, 소유권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내아문(內衙門))는 '관리권'마저 북장로회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그러함에도 병원과 의학교육 기능은 1897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복원된다. 1902년 알렌이 제중원 '소유권'을 얻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를 보면 북장로회는 처음부터 제중원을 선교회 부속병원으로 삼으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북장로회는 다른 활로를 모색한다. 미국 대부호 세브란스로부터 거액을 기증받아, 숭례문 밖 복숭아골(서울역 앞)에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한다. 제중원 의료진과 의료기구, 의료기록 등이 새로 지은 병원으로 옮겨간다. 1년 후 북장로회는 약정서 체결을 통해, 구리개 제중원을 정부에 반환한다.

관립으로 세워진 여러 의료기관

1895년 11월 '종두의(種痘醫)양성소규정'이 공포되어 서양의학에 근거를 둔 전문 교육기관 종두의양성소가 생겨난다. 1개월 단기 과정이나, 졸업하여 의적(醫籍)에 등록되면 전국 종두소에 파견되어 일할 수 있었다. 1899년 의학교관제가 마련될 때 양성소는 의학교에 편입된다. 의학교 교장인 지석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종두 등 의료에 소용되는 백신을 제작하던 건물과 종사원들의 1909년 모습.
▲ 백신제작소(1909) 종두 등 의료에 소용되는 백신을 제작하던 건물과 종사원들의 1909년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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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과 만민공동회 격랑을 지나면서 아관파천 후 목숨을 잃은 김홍집 집터(현 종로경찰서)에 1899년 3월 '의학교'가 세워진다. 1895년 〈교육입국조서〉에 따른 후속 조치다.

3년제로 총 16개 교과목에 기초과학, 기초의학, 임상의학이 두루 포함되었다. 의학교관제에 따라 설립된 학교는 첫해 50명이 입학하여 1902년 1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하지만 대한의원에 통폐합될 때까지 겨우 36명(2회 13명, 4회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1899년 4월 '내부병원설립관제'를 근거로 내부병원이 설립되어 다음 해 광제원으로 개칭된다. 일반환자 치료 외에 전염병 환자를 격리하는 별도 시설로 피(避)병원을 운영하고, 감옥 죄수를 5일 간격으로 진료하였다. 외과의·소아의·침의·대방의(大方醫, 내과의사), 향약(鄕藥)의사 등 양의와 한의가 함께 진료하는 체제다. 그러나 일제는 미개한 의술이라는 이유로 1906년 광제원에서 한의사들을 축출해 버린다.

대한제국은 20세기 초 국제적십자 조약에 서명한다. 1905년 10월 고종은 '칙령 제47호 대한적십자사규칙'을 반포하여 기틀을 갖추고 1906년 2월 적십자병원에 건축비 2만 원을 지원한다. 적십자병원은 설립 후 영추문 밖 한옥에서 진료해오다가 확장할 필요가 생겨 그해 10월 이화동(壺洞)으로 확장 이전한다.

대한의원 설립
 
1908년 설립 당시 대한의원 본관 모습. 진입로 양 옆으로 논밭이 있고,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가 인상적임.
▲ 대한의원 본관(1908) 1908년 설립 당시 대한의원 본관 모습. 진입로 양 옆으로 논밭이 있고,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가 인상적임.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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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원 본관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통감부에 의해 탁지부 일본인 설계로 1906년 착공, 1908년 시계탑을 갖춘 2층 건물로 세워진다.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 특히 대한의원이라 이름 지은 이토 히로부미 작품이다.
 
본관 신축 후 순차적으로 세원진 병동(7개 동)과 부속건물의 1908년 모습.
▲ 대한의원 병동(1908) 본관 신축 후 순차적으로 세원진 병동(7개 동)과 부속건물의 1908년 모습.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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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의정부 직할 '대한의원관제'를 반포하여 대한의원에 의학교 및 광제원과 적십자병원을 통폐합한다. 창경궁 바깥 정원인 함춘원(含春苑)자리 8.87만㎡에 병동 7동, 해부실, 의학교 등이 순차적으로 들어선다. 거액의 공사비 40만 원을 일본은 차관형식으로 대한제국에 떠넘긴다. 국립의료원 위상에 걸맞게 설립 당시 규모가 가장 큰 병원이었다.

치료·교육·위생의 3부를 둔 관제를 내부(內部)관할의 치병부·의육(醫育)부 및 위생시험부의 1907년 관제로 바꾼다. 이 관제에 따른 원장·부원장을 비롯한 의료종사자들 대부분이 일본인이고 한국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된 치료 대상도 일본인 거류자들이었다.
 
경성제국대학에 편입되어 진료와 치료, 교육과 연구기능을 수행한 본관의 현재 모습.
▲ 대한의원 본관 경성제국대학에 편입되어 진료와 치료, 교육과 연구기능을 수행한 본관의 현재 모습.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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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이 관제를 개정하여 3부를 폐지하고, 대한의원에 부속 의학교를 두어 의료인 양성에 중점을 둔다. 강제 병합 뒤엔 총독부 의원이었다가 경성제대가 설립된 후인 1926년 대학에 편입되어 진료와 치료, 교육과 연구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변모한다.
 
장식적으로 만든 변형기둥을 적용한 전면 포치.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듬.
▲ 전면 포치 장식적으로 만든 변형기둥을 적용한 전면 포치.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듬.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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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바로크와 르네상스, 빅토리안의 절충형이다. 정육면체의 네 귀퉁이에 기둥을 덧붙인 마름모꼴로 만든 중앙시계탑은 의도적으로 장식 효과를 높이려 애썼다. 출입구 포치에 아치와 배부른 변형 기둥으로 모양을 내었고, 차가 다닐 수 있도록 해 응급환자를 곧바로 안으로 후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치 모양 창틀과 층 구분 및 기둥장식에 사용된 화강석이 붉은 벽돌과 이루는 조화가 멋스러움.
▲ 세부장식 아치 모양 창틀과 층 구분 및 기둥장식에 사용된 화강석이 붉은 벽돌과 이루는 조화가 멋스러움.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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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전체적으로 장식성이 뛰어나다. 아치 창틀과 층 구분에 사용한 정교한 화강석은 붉은 벽돌과 색채 차이를 보이며 마치 모자이크처럼 꾸몄다. 창틀은 반원형 아치 2차원 면 장식이고 지붕은 동판이다.

서울대병원과 연세의료원이 제중원 정통성, 즉 현대 서구의학의 시원(始原)을 두고 논란을 빚었던 모양이다. 북장로회 선교회가 가졌던 제중원 운영권(1885)과 관리권(1895). 그리고 새로 만든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전하여 적용한 운영시스템. 대한제국 정부로 회수된 시설관리권과 소유권. 운영 실체가 사라져버려 빈껍데기만 남은 국립의료기관으로써 제중원. 그 후 설립된 의학교와 광제원이 제중원을 잇는 기관인가 하는 점 등 제반 사실들에 대한 규명과 개념 정립이 아직은 미흡해 보인다.

그러함에도 나라를 앗기는 시공간에서 파생된 제중원 정통성(서구의학의 시원始原) 시비가,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유산인지는 잘 판단이 서질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사진 자료에 협조해 주신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관계자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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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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