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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4.3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배보상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뉴스를 보면서 문득 제주로 귀향하던 5년 전, 1940년에 태어나 1948년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엄마의 생애에 대해 듣고 기록해 두었던 기억이 났다. 제주라는 한반도 끝 변방에서 태어나 4.3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이제라도 잘 정리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재를 시작한다. 글은 엄마의 시점에서 서술했다. - 기자 말
 
엄마의 20대 때 모습
 엄마의 20대 때 모습
ⓒ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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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선명한 장면들과 안개처럼 흐릿한 주변 사건들이 서로 혼재된 기억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동네사람들이 상여를 매고 장지로 가고 있었다. 나는 어른들 끝자락을 부지런히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십 대의 일본군 비행기가 출몰하여 사람들을 위협하듯 아주 낮게 날았다. 아무리 수상한 시절이었지만 거대한 쇳덩어리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광경은 공포스러웠고 사람들은 서둘러 상여를 내려놓고 몸을 숨기기 바빴다. 각자의 틈을 찾아 몸을 숨긴 사람들은 도적떼 같은 비행기 무리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나도 어른들을 쫓아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비행기가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그 날이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날이라는 것을 나중에 들었다. 일본군 비행기들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최대한 땅 가까이 낮게 날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나는 그 날이 무슨 날인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거대한 쇳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나는 모습을 기함과 두려움을 안고 바라보았다.
 
송악산 외부 능선 해안에 있는 일본군의 군사시설로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송악산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진지동굴이 60여개소나 되며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다.
▲ 송악산 일제 동굴진지 송악산 외부 능선 해안에 있는 일본군의 군사시설로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송악산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진지동굴이 60여개소나 되며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다.
ⓒ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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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오빠 둘과 언니,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이 동생이 있었다. 언니랑 놀고 싶어 쫄래쫄래 꽁무니를 쫓아가면 언니는 뒤쫓아 오는 어린 동생이 귀찮은지 저만치 앞서 뛰어가다 나무 뒤에 숨어버리곤 했다.

때론 중간에 언니를 잃어버린 나는 엉엉 울며 동네를 헤맸다. 아버지는 굉장히 엄한 편이어서 어둠이 내리면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금했다. 우리 집은 동네와 떨어져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마을 공회당에 천막학교가 세워졌다. 드디어 나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엔 많은 아이들이 있는 가운데서 말 한마디 꺼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수업 중간에 오줌이 마려워도 그 말을 선생님에게 하지 못해서 옷에 오줌을 지렸던 기억도 선명하다.

찬성과 반대가 뒤얽힌 어수선한 시대

광복이 되었지만 동네는 이상한 분위기에 술렁거렸다. 젊은이들은 저녁마다 모여서 무언가를 의논했고 그들의 눈빛은 결연했다. 그 중에 가장 중심이 된 이는 고칠종이라고 마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였다.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명문인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고등학교 교사를 학고 있었다. 청년들은 고칠종 주변에 모여 들어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등 결의에 차 있었고 아버지를 찾아와서 무언가를 계속 설득했다.

그 때가 내가 아홉 살 즈음 되던 해였으니 1948년이다.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는 어수선했고 그 해 남한에서만 단독 선거를 치러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뒤얽혀 어수선한 시대였지만 제주도는 반대하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당시 아버지를 찾아왔던 동네 청년들도 남한만 치르는 5.10 단독선거에 참여하지 말고 잠시 피신을 가자고 설득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4.3이 시작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이들이 선거를 막기 위해 4월 3일 무장대를 조직하고 오름마다 봉화를 태운 후 일제히 경찰지서를 습격했다고 했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당시 무장대들이 도민들에게 뿌린 호소문)

유일하게 선거를 막아낸 지역 제주, 그러나

아버지는 어린 애들을 데리고 어디로 피신 가냐고 가지 않겠다고 처음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막상 선거날이 다가오자 마음을 바꾸셨는지 짐을 꾸렸다. 간단한 식량과 이불꾸러미를 챙기고 고령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하는 동네 노인들에게 남겨진 가축들의 먹이를 부탁했다. 그리고 갓난아이부터 10대인 큰 아들, 딸, 아직은 철이 들지 않은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떠났다. 왜 집을 떠나야 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절대 아버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는 내내 아버지의 허리춤을 꼭 잡았다.
   
다행히 피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많은 도민들이 산으로 올라갔고, 그 결과 제주에서 남한 5.10 국회의원 단독선거는 총 세 곳 중 한 곳만 성사될 수 있었다. 두 곳이나 투표가 무산된 것이다.

제주는 유일하게 선거를 막아낸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은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피난을 떠났던 아버지, 어머니, 동네 청년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괴력을 가지고 이후 우리의 삶을 유린했다.

당시의 제헌국회 의원 정수는 200명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선거구 두 곳에서 선거를 하지 못하면서 제헌국회는 의원 198명만으로 개원했다. 

제주에서 두 곳이나 선거에 실패하자 정부는 많은 군인들과 경찰 등을 앞세워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에게 제주도는 이미 '빨갱이의 섬'이었다. 선거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과거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칠종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 단독 선거에 대대적으로 반대했기에 오도롱은 그들에게 빨갱이 마을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토벌대의 광분어린 습격을 피하기 위해 다시 짐을 싸야만 했다.

어둡고 춥고 불편하고 무서웠던 동굴생활
 
제주4.3을 소재로 만든 영화 <지슬> 스틸컷.
 제주4.3을 소재로 만든 영화 <지슬> 스틸컷.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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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네 사람들은 '습궤'라는 땅 속으로 깊게 판 큰 동굴에 모여 피난 생활을 했다. '습궤'는 꽤 넓은 바위동굴이어서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들어가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셨기에 우리 가족은 '습궤'가 아닌 다른 곳을 찾아 헤매야 했다. 

나는 행여나 아버지를 놓칠세라 조막만 한 손으로 아버지의 허리춤을 꼭 잡고 절대 놓지 않았다. 큰 오빠가 이불을 짊어졌다. 우리 가족이 지낼 수 있는 동굴을 찾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간신히 우리 가족에게 맞춤한 동굴을 찾아냈다.

길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동굴 생활은 끝이 나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먹을 것은 바닥을 보였다. 동네 청년들이 민가에서 구해온 식량을 나눠주어 간신히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동굴 생활은 어둡고 춥고 불편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를 둘러싼 삶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고칠종(1921~?) : 남로당 조직부장, 제주농업중(6년제) 교사, 제주읍 이호리 '오도롱-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로당 애월면 특별지구 지도원, 남로당 도당부 이종우(대정)의 후임 조직부장을 지냈으며 제주농중 학생들에게 남로당의 외곽 전위조직을 확대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도록 기여했다. 그는 동료 교사들보다 조직력에 돋보였다.

앞서 강창우(대흘)·이시형(애월)·김학림·한병택(조천) 등과 함께 민주청년동맹의 후견자 노릇을 했으며, 조직과 선전에 수완을 보여 구국투쟁위원회 선전부장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시내 학생들(제농, 교양,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의 양과자 반대운동과 친일파 숙정운동 및 비밀 점조직을 전개했다. 1947년 4월 18일 제주경찰감찰청 특수수사과는 교사 고칠종을 수감하고 남로당원 12명을 체포해 취조했다. 고칠종은 1948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전위대로서 민청으로 하여금 제주3·1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서게 했다.(출처 : 제주일보)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SNS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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