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영화의 개척자, 민족영화 '아리랑' 감독 나운규

국립대전현충원에는 문학과 예술로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들도 영면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의 개척자이자 대표자이며, 민족영화 '아리랑'의 각본·감독·주연을 맡았던 나운규 감독이다.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명동학교 출신으로는 한국인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인 서왈보, 시인 윤동주 등이 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야만적인 간도참변을 자행하며 명동학교에도 불을 질러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명동학교 시절 나운규. 오마이뉴스 사진자료.
 명동학교 시절 나운규. 오마이뉴스 사진자료.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나운규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1920년에 북간도의 한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일제의 수비부대 간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회청선) 폭파임무를 수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이 회청선 폭파사건으로 친구 윤봉춘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1923년 출감 후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 창립에 관여했다. 1924년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조선키네마'에 들어가 윤백남 감독이 만든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 '심청전'에서 첫 주연으로 캐스팅돼 심 봉사 역을 맡았다.

그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과 '풍운아'를 직접 쓰고 감독·주연을 맡아 영화계의 귀재로 불리고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나운규
 나운규
ⓒ 국가보훈처

관련사진보기


1927년에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서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등을 만들었다. 1929년에는 격조 높은 문예영화 나도향 작가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를 영화화한 '벙어리 삼룡'을 만들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프로덕션이 재정난으로 해체되고 난 후 '아리랑 후편', '철인도'를 제작했으나 우리 영화계에서 꺼리던 일본 도야마프로덕션의 '금강한(金剛恨)'에 출연하는 바람에 욕을 먹기도 했다. 그는 생활을 위해 악극단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영화계를 1년여 동안 시찰한 후 1932년에 귀국해 윤봉춘을 비롯한 옛 동지들을 모아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으나, 검열로 많은 장면이 잘린 채 개봉돼 흥행에서 큰 실패를 보았다.

나운규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주연으로 출연해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문명비판, 사회비판 등을 보여주는 '무화과', '강 건너 마을'을 제작했다. 이밖에 '종로', '칠번통의 소사건', '그림자' 등을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36년 우리나라 영화계에 획기적 선풍을 일으킨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나운규는 '아리랑' 제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하였으며 문예영화로 방향을 틀어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1937년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의 나운규(라운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의 나운규(라운규) 묘소.
ⓒ 우희철

관련사진보기


그는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한 암자에 안치되었다가, 해방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1993년 동료 영화인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현충원에는 '라운규'라는 이름으로 묘비에 새겨져 있다.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됨으로써 독립군 시절 자신이 상관으로 모셨던 홍범도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주제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우리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 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한국영화감독협회는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1990년부터 한국 영화, 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춘사영화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 작가 이전에 독립운동가 주요섭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 패러디물의 소재로 사용된 소설 중 하나가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개봉된 이래, 1978년에도 영화화됐고, 1981년에는 KBS 'TV 문학관'에서 단막극으로 드라마화하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면서 독립운동가인 주요섭. 1902년 평양에서 개신교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요섭(요셉)'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형은 최초의 근대시 <불놀이>로 유명한 시인 '주요한'이며 동생은 극작가인 '주영섭'이다.

주요섭은 1919년 평양에서 3.1 운동에 참가했고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과 비밀리에 독립신문사를 만들고 등사판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1년 19세 때 <개벽>에 데뷔작으로 단편 '추운 밤'을 발표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상하이 삼일예배당에서 '재상해한인학생회'가 개최되었을 때 대한독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야 한다는 취지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3년 상하이 후장대학에 들어간 그는 1925년 <개벽>에 단편 '인력거꾼'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카프(KAPF) 계열 신경향 소설의 대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된다. 1927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개벽>과 <동광> 같은 잡지에 중편 '첫사랑'을 비롯해 단편 '살인', '개밥', '첫사랑값' 등 주로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층 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을 다룬 신경향 소설을 잇달아 발표한다.
 
1972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에 주요섭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다.
▲ 경향신문의 주요섭 타계 기사 1972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에 주요섭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다.
ⓒ 경향신문

관련사진보기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1931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동아> 주간으로 일하면서 <동아일보>에 장편 '구름을 잡으려고'를 연재한다. 그 후 중국 푸렌대학(輔仁大學) 교수를 지내다 1943년 귀국해 해방을 맞은 그는 코리아타임스 주필, 경희대학교 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코리안리퍼블릭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초기의 신경향 색채에서 벗어나는데,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 1935년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대서', 1936년의 '아네모네의 마담', '추물(醜物)', '봉천역 식당' 등이다.

일제강점기에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을 다수 남겼지만 대표작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가려져 다른 작품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게다가 대다수 사람들이 소설의 제목을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기억함으로써 중의적 의미가 사라지고 통속적 이미지만 남는 문제도 생겼다.

1972년 심근경색으로 여생을 마쳤다. 2004년, 주요섭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면서 경기도 금촌기독교공원묘지에 있던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507호로 이장됐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주요섭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주요섭 묘소.
ⓒ 우희철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태그:#국립대전현충원, #나운규, #주요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역 일간신문에서 사진기자로 활동, 2007년 <제1회 우희철 생태사진전>, <갑천의 새와 솟대>, 2008년 <대청호 생태사진>, 2008년 <하늘에서 본 금강> 사진전 동양일보 「꽃동네 사람들」, 기산 정명희 화가와 「금강편지 시화집」을 공동으로 발간. 2020년 3월 라오스 신(新)인문지리서 「알 수 없는 라오스, 몰라도 되는 라오스」를 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