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4 07:34최종 업데이트 22.01.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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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설거지론'이라는 걸 처음 보았을 때, 당연히 여성들을 공격하는 워딩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게도) 그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공격하는 워딩이었다! 밈스플레인을 해보자면, 소위 '냄비'라고 여자들을 불러온 역사 그대로, 성경험이 있는 여자를 더러워진 그릇이라고 치부하는 밈이다. 그런 여자들이랑 결혼하는 건 '설거지'라는 것이다. 즉, '몸 함부로 굴리던' 여자들을 일생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먹여 살리고 있는 '멍청한' 남자들을 공격하는 단어였다.

당혹스러운 전제가 몇 겹씩이나 쌓여 있어서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제를 하나씩 뜯어보자.

남성을 공격하는 설거지론
 

ⓒ pixabay

 
① 남자는 여자를 먹여 살린다
주변 어딜 봐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임금노동을 하는 가족형태가 대부분이라는 당연한 사실은 일단 제쳐두자. 이런 종류의 직관을 강타하는 전제들은 원래 실제 사실과는 무관하다. 믿고 싶은 편향을 강화시켜야 사람들한테 더 빨리 영향을 미치니까. 첫 번째 전제는 남자는 여자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마누라랑 자식새끼 먹여 살리려고 뼛골 빠지게 일하는 80년대 드라마형 남자 생계부양자가 이 이야기 안에 있다. (80년대도 드라마만 그랬지 현실은 아니다.)

② 남자가 먹여 살리고 싶은 여자는 '순결한' 여자다
2021년에 이런 전제가 통용되는 걸 보면 벌써 마음이 착잡해지는데, 얼마나 많은 인간이 타자와 사회적 관계를 못 맺고 살아가는지 전제만으로도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거를 소재로 한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가 2003년에 나왔는데, 2021년에!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전제는 3번째 전제와 연결된다.


③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척 속인다
마누라 졸업사진을 보니 교복 치마도 줄인 '핵인싸'였다, 어쩌면 나도 설거지 당한 게 아닐까, 인터넷에 떠도는 썰들을 보면 '순결하지 않은' 여자에서 이들이 추출해내는 건 어쩌면 오로지 내 부양능력 때문에 나와 결혼한 거고, 어쩌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그걸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④ (인기 많은) 다른 남자를 경험해 봤다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
라는 전제가 또 하나 도출된다.

물론 남성을 공격하고 있긴 해도, 이건 여성혐오적인 표현이다. 몽둥이처럼 여성(과 여성에 대한 온갖 편견)을 집어 들고 다른 남성을 때리고 있으니, 맞는 남자도 아프겠지만 몽둥이로 쓰이는 여자도 아플 수밖에 없다. 매우 긴 시간 동안 당연하게 여성혐오는 몽둥이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긴 시간 동안 인류 역사에 철두철미하게 새겨져 온 '여성'은 일종의 '돈'이나 '명품' 같은 것이라서 얼마든지 몽둥이가 될 수 있다. 가난하다고 사람을 비웃고, 짜가를 들고 다닌다고 사람을 비웃는 것처럼, 여자가 없다고 혹은 가지고 있는 여자가 더럽다고 사람을 비웃을 수 있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증명하는 물건이니까. 그리고 그걸 페미니즘은 가부장주의라고 부른다.

도태남의 이야기

아무튼, 남자분들끼리 여성혐오를 몽둥이로 써가며 서로를 패는 광경을 옆에서 보는 여자(혹은 자원)로서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는 많은 사람은 이게 '도태남'들의 얘기라고 일축했다. 인간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연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이성애적 관계를 이해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의 한심스러운 이야기라고.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얘기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도태남'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전적으로 도태란 "여럿 중에서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을 줄여 없앰"이란 의미다. 여성과 짝을 이루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은 '선택'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자원의 목적이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것에 있다면, 남성이라는 주체의 가치는 누구를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 논지에 따르면 반반한 얼굴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참하고 순결한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면 남성으로서 성공한 인생이다. 모 커뮤니티에서 "설거지론을 박살내기 위해 여자들이 도시락 사진을 인증할 줄 알았다"고 한탄하는 남성유저의 글은 다방면으로 재미가 있다. '진정으로 남성을 사랑하는 모습'은 '남자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행위'와 같이 아주 전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여자들은 진정으로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로 간주된다.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을 것이다. 서로를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 타인의 프레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타인과 나를 함께 변화시키는 것에 이르기까지 층위도 다양하고 정의도 다양하다. 설거지론에 대해서 말하거나 불안해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에는 추호도 의심이 없다. 심지어 지금껏 사랑받는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 순전히 이용당한 것일까봐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사랑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들의 실제 삶이 얼마나 전형성에 근사한지와는 무관하게(여러분, 높은 확률로 양자가 임금노동하고 계시잖아요. 아닌 척 멈춰!) 이들에게 사랑은 '상대를 먹여 살리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생계부양자로서 돈을 벌고, 그 결과로 사랑하는 이들을 먹여 살리며, 이들에게 사랑·존중·존경받는 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에 보답하는 사랑의 형태가 바로 '도시락'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재생산 노동과 생계부양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게 없다면 상대방의 사랑은 '사랑'으로서 인식되지 못한다.

이 강력한 전형성의 프레임 속에서 여자는 순결한 존재여야 한다. 10년 전만 해도 없었을 것 같은 지극히 퇴보적인 이 프레임은 단순히 남자들이 더 반동적이 되고 퇴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순결하지 않은 여자가 '싫은' 것보다, 이들은 순결하지 않은 여자를 '두려워'한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계를 경험해본 여자가 본질적으로 '도태남'인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말을 유통하는 이들은 경험이 많은 여자에게 속지 않겠다며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해댄다.

즉, 이 '설거지'라는 단어는 현실과는 1도 상관이 없는 그 단어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와 관계 맺기에 철저하게 실패한 2021년의 젊은 남성을 몹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프레임이다. 사랑받을 자신이 없는 이들이, 타인의 사랑을 못 믿어서 전형성을 갖가지로 끌어와서 서로를 두들겨 패는 광경이다.

관계맺기에 실패한 남성들의 프레임
 

ⓒ envatoelements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광경이 몹시 복잡해서 오히려 재미있게 보였다. 전형성은 긴 경험으로 축적된 거라서 어떤 면에선 인사이트를 가지지만, 동시에 바뀐 세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기도 한다. 전형성은 어떤 근거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직관에만 호소한다. 직관은 때로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돈 벌어오는 듬직한 남편과, 그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프레임이 정확히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전형성으로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사랑은 구체적인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전형성이란 구체 앞에서는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다. 제각기 다른 사랑의 방식은 전형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코를 찡그리는 표정, 눈꺼풀의 깜빡이는 속도, 발을 떼는 방식 같은 것들처럼 반드시 구체는 전형을 부정한다. 전형성의 프레임을 깨지 않는 이상,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접근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모두 개인의 프레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랑의 본질은 그 프레임을 상대의 구체성으로 깨나가고 재구축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프레임이 합종연횡 하는 과정이다. 프레임이 안 깨지면 사랑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설거지론'을 말하는 쪽이나, '도태남'을 말하는 쪽이나 사랑불능인 건 마찬가지인 셈이다. 결혼한 남자들에 대해서 설거지 세제 이름을 따 '퐁퐁단'이라고 낄낄대면서 프레임에서 탈주하는 힘을 키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도 프레임에서 탈주할 자신이 없다. 타자와 관계 맺지 않는 이들이 차고 넘치며,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점점 알 수가 없어서 그렇다. 하지만 종종 전형성을 뒤집어버리는 구체적 인간을 만나는 게 삶이기도 하다. 최근 결혼한 친구는 '퐁퐁단'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행복이 퐁퐁 솟아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다며, 앞으로 그 단어는 그렇게 쓰기로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망가진 세상에서 망가진 방식으로 오래 살다가 프레임을 깨뜨리는 힘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퐁퐁단'을 뒤집어버린 친구 얘기를 듣고 웃다가, 어떤 사람들이 전형으로만 사랑을 호명할 수 있다면 프레임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어쩌면 사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로 인해서 밀려오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다 보면 프레임을 깰 힘이 생길지도 모르고.

'설거지' 프레임 속에선 어떻게 해도 상대방 설거지 시킬 일밖에 없이 열심히 연애하고 살아온 30대 여자인 나는, 혹시나 설거지를 시킬 일이 생긴다면 쉽고 편하게 씻길 수 있는 식기세척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뽀득뽀득하게 잘 씻기도록 밀레 식기세척기면 좋겠다. 잘 씻어서 프레임까지 싹싹 지울 수 있으면 더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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