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길 위의 쉼표에서 그의 숨 내음을 맡다

저자 박노해는 길에서 산다. 무기수가 되어 감옥 독방에 갇힌 것도,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 지역을 찾는 것도, 길 찾아 길로 나서서 길을 걷는 행위다. 가난과 노동과 고난으로 점철된 그 길들은 외져서 다져지지 못한 길투성이다.
 
박노해 지음 <걷는 독서> 겉표지
 박노해 지음 <걷는 독서> 겉표지
ⓒ 느린걸음

관련사진보기

 
<걷는 독서>는 그 유‧무형의 길들을 걸으며 비로소 접속한 "한 생각"들로 빼곡하다. 수첩에 적느라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 그 길 위의 쉼표들이 30여년 쌓여 900쪽 가까운 두께를 이룬다.

그러니까 <걷는 독서>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은, 쉼표들로 이루어진 박노해의 인생길을 통째로 선보인다. 정색하고 진지해서 자칫 꼰대스러울 내용을 상큼한 형식에 담은 구성이 눈에 띈다.

책장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세트(사진&단상&영역英譯)가 안구정화는 물론 쉼표의 숨결을 곱씹게 한다. 그가 강조하는 "참된 독서란/ 자기 강화의 독서가 아닌/ 자기 소멸의 독서다."에 자연스레 빠지게 한다.

쉼표들은 낱낱으로도 씹는 맛이 있지만, 쉼표들을 연계해 박노해의 인식 지평을 가늠하는 것도 의미 있다. 나는 두 방식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걷는 독서>를 음미했다.

'~라'의 청유형이나 명령형보다는 결을 삭인 듯한 단상에서 그의 숨 내음을 맡는 게 더 좋았다. 그러나 이 리뷰에 인용된 쉼표들은 내 후각을 자극한 쉼표들만은 아니다. 박노해스러운 독서, 즉 걷는 독서를 리뷰 편지로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들도 함께 추렸다.

그의 사랑은 프로급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다

사람마다 나름의 경험치가 있다. 그 경험치가 여기서는 "독서"다. 걷는 독서는, 낯선 너른 세계로 몸소 섞여 들어가면서 익히는, 세상살이에서 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고유한 "자신이 되기(becoming a self)" 위해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걷는 거다. 그때 필요한 게 사랑이다. 그에게 "사랑은 자신을 다 사르는 것"이고,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힘 들어야/ 힘이 들어온다."는 차원 높은 주고받기다.

그런 관점에서 박노해의 사랑은 프로급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다. '얼굴 없는 시인'에서 무기징역수를 거쳐 '나눔농부마을' 설립자에 이른 디자이너의 혁명 자체다. 그에게 디자인과 혁명은 "자신이 되기"를 열망하는 차원에서 상통한다. 그러나 그 열망은 머리나 마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은 발바닥이다"를 행하며 현장을 딛고 있기에, 그는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좋은 디자인은/ 사물의 본질적 쓰임과/ 물질의 심장에 곧바로/ 이르게 하는 것."(159쪽) 
"혁명이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본성대로 돌려놓는 것이고/ 참모습을 되찾는 것이다."(162쪽)
 
그는 내게 발바닥 선생님이다

내가 박노해를 기억하는 건 결여된 세상을 살아서다. 내년 치를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때라 그런지, 20년 이상 국경 너머 분쟁을 지켜본 그의 쉼표,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에 꽂힌다.

안 좋은 결과를 마주하고 국민을 탓하지 않았던 고 노회찬 의원처럼, 그 역시 "좋은 농부에게 나쁜 땅은 없다"고 말한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치기하는 지금 이곳에서 "갈라진 두 마음으로는/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가 대세론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회를 향한 길은 나의 좋은 삶에서 비롯된다는 역설이 "몸은 모음이다./ 온 우주가 모아진/ 내 한 몸이다."에서 읽힌다. 더군다나 K방역과 K팝, 그리고 '오징어 게임' 등을 통해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보기에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간 형세다. 이참에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를 정치판에서 보려면, "결여만이 줄 수 있는 간절함, 견디는 힘,/ 궁리와 분투, 강인한 삶의 의지"를 각자 좋은 삶을 일구는 데에 먼저 써야 한다.

이래저래 <걷는 독서>를 짓는 박노해는 내게 발바닥 선생님이다. 발바닥으로 딛는 현장은 예민하게 와 닿는다. 미세한 알갱이도 감지될 만큼. 그래서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과 쉽게 맞닥뜨릴 수 있고, 그러다 상처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현장이 변하면 진실도 변한다." 어떤 악조건에서든 "긴 호흡/ 강한 걸음."으로 현장 변화를 꾀하는 정치가 꽃피길 바란다. 이제껏 중단 없이 길 위의 쉼표들을 쏟아낸 박노해를 열렬히 응원하는 만큼.

걷는 독서

박노해 (지은이), 느린걸음(2021)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온갖 종류의 책과 영화를 즐긴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입양을 앞둔 네 살배기의 선택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