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4 20:20최종 업데이트 21.11.0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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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해임된 오스트리아 총리 제바스티안 쿠르츠에 관한 <데어 슈탄다드>(Der Standard) 10월 7일 자 기사 ⓒ 데어 슈탄다드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대서특필되는 일이 많지 않다. 혹시 그런 경우라도, 긍정적인 일에 연루되는 일은 거의 없다. 현재 오스트리아에 집중된 관심도 마찬가지다.

오스트리아의 유력 일간지 <데어 슈탄다드>(Der Standard) 10월 7일자 기사의 한탄이다. 최근 해임된 오스트리아 총리 제바스티안 쿠르츠(Sebastian Kurz)에 대한 이야기다.

10월 초 오스트리아는 쿠르츠 스캔들로 발칵 뒤집혔다. 쿠르츠가 국민의 세금을 이용해 타블로이드 신문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에 쿠르츠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여론조사와 사설을 보도하게 한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부패 사건 검찰'(die Wirtschafts- und Korruptionsstaatsanwaltschaft, 이하 '검찰')은 이것이 실제로 여론에 영향을 미쳤고, 쿠르츠가 총리 자리에 오르기까지 짜여 있던 시나리오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매체들은 보도했다.

쿠르츠는 누구?

'세계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가진 쿠르츠는 1986년생으로 오스트리아 보수 정당인 국민당(Österreichische Volkspartei) 청년 대표로 2009년 정치를 시작했다. 2013년에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2017년에는 당대표가 되었다. 2017년 총선에서 11년 만에 제1당으로 올라선 국민당은 우익이자 민족보수주의 정당으로 분류되는 자유당(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과 연립정부를 수립했고 쿠르츠는 만 31세의 나이로 총리에 올랐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가 '유럽 보수주의자들의 골든 보이'라고도 칭한 쿠르츠의 정치 이력은 일견 엘리트 정치인의 탄탄대로로도 보이지만, 이번에 드러난 내막을 보면 거의 넷플릭스 드라마 수준이다. '제바스티안 쿠르츠는 어떻게 오스트리아의 총리가 되었나(Wie Sebastian Kurz zum Kanzler von "Österreich" wurde)'라는 제목의 <데어 슈탄다드> 10월 7일 자 기사에 따르면 이렇다.

총리 자리를 위해 쿠르츠가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동원해 체스판 위의 말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외무부 장관으로 있던 때다.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는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Österreichs) 소속의 크리스티안 케른(Christian Kern)이었다. 당시 제1당이던 사회민주당은 국민당과 연립정부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국민당의 대표였던 라인홀트 미터레너(Reinhold Mitterlehner)가 쿠르츠의 첫 타깃이 됐다.

미터레너를 밀어내고 당대표 자리에 앉기 위해 쿠르츠와 친구들은 <외스터라이히>지를 창간한 볼프강 펠너(Wolfgang Fellner)와 함께 조작된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자유당의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Heinz-Christian Strache)가 34%의 지지율로 가장 크게 앞서고, 당시 총리였던 케른은 그 다음 순위를, 미터레너는 가장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국민당은 방향 전환을 해야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사설도 함께 실렸다.
 

부패 혐의를 받은 제바스티안 쿠르츠(35) 오스트리아 총리가 현지시각 9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선언했다. 2021.10.9 ⓒ wiki commons

 
여러 매체에 따르면 이 조사 결과는 당시 다른 매체들에 실렸던 여론조사 결과와는 달랐다. 미터레너에 대한 여론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쿠르츠가 차기 당대표로 부상하도록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여론조작은 이미 그 자체로 큰 범죄이지만 쿠르츠와 친구들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친구들" 중 한 명이자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토마스 슈미트(Thomas Schmid)는 <외스터라이히>에 130만 유로(한화 약 17억 8천만 원)를 지원하는 재무부 산하 협약을 맺었다. 검찰은 이것을 여론조작에 대한 대가성 협약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론조작을 위한 자금에 국민의 세금이 사용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조작된 여론의 여파로 2017년 5월 미터레너가 당대표직에서 사퇴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리하게 형성되어 있던 여론에 힘입어 쿠르츠는 후임 당대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국민당의 대표 자리에 올라 쿠르츠가 처음 한 일은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를 깨고 새로 총선을 치르게 만든 것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케른이 소속되어 있던 사회민주당은 제1당이긴 했지만 국민당과 연립정부를 이루고 있었던 상황인 만큼 국민당이 연립정부를 해체시키는 순간 오스트리아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치러진 선거에서 국민당이 제1당으로 발돋움한 뒤에 쿠르츠는 사회민주당이 아닌 자유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기사회생했지만... 결국 사임  

총리에 오른 후 쿠르츠의 가장 큰 위기는 2019년 '이비자 스캔들'로 불리는 사건의 여파로 정부가 해체된 일이었다. 연립정부를 이루고 있던 자유당 대표 슈트라헤가 스페인의 이비자 섬에서 자신을 러시아 재벌의 조카라고 소개한 여성에게 재정적 후원을 받는 대신 정부의 사업권을 주기로 하는 대화 내용이 녹화되어 공개된 일이었다.

최악의 부패 스캔들로 불리며 오스트리아를 시끌시끌하게 했던 이 일로 쿠르츠는 자유당과의 연대를 철회해야 했고, 정부가 해체된 오스트리아에서는 다시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총선 결과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국민당은 이번에는 녹색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기사회생해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른 쿠르츠는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검찰은 쿠르츠 및 관련자 9명을 수사하고 있다. 총리의 집무실을 비롯해 국민당 당사 등 여러 곳을 압수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관련자들의 핸드폰을 비롯한 증거물들도 압수했는데, 이들 사이에 오간 채팅 내용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여론조작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쿠르츠가 관련자들에게 특정 자리를 약속하는 등의 내용이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신종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규제조치를 두달 만에 완화, 상점들의 영업을 허용함에 따라 9일(현지시간) 수도 빈(비엔나)의 시민들이 시내에 나와 쇼핑을 즐기고 있다. 2020.6.9 ⓒ 연합뉴스

 
혐의가 드러난 이후 쿠르츠는 시종일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총리 사임을 거부해왔다. 그러나 결국 10월 9일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국민당과 연립정부를 이루고 있는 녹색당이 쿠르츠에 대한 불신임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다만 연립정부는 지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현재는 국민당 소속의 알렉산더 샬렌베르크(Alexander Schallenberg)가 후임 총리 자리에 올랐고 쿠르츠는 국민당의 대표로만 남아 있다.

상황이 일단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민당 내에서 쿠르츠의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하고, 후임 총리인 샬렌베르크는 쿠르츠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의 정세 변화에 따라 이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쿠르츠는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아직 국민의회 소속으로 면책 특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 현재 검찰은 쿠르츠를 인도 받기 위해 면책 위원회를 통해 국민의회에 신청해둔 상태다. 11월 중순 의회 총회에서 이에 대한 결정이 나오게 된다. 그 외에도 검찰은 이 범죄에서 쿠르츠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입증해야 되는 숙제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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