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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씨가 선서하는 모습.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씨가 선서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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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권 부정선거로 다시 패배의 쓴 잔을 들게 된 김대중 후보는 노태우를 "부정선거에 의한 당선" "축복받지 못한 당선"이라 규정하고, "이것이 과연 앞으로 정국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고 노태우 정권의 건재를 보장할 수 있는가가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비판하면서 덧붙였다.

이번의 당선은 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정이 거의 공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선거투표 2, 3일 전부터 노태우씨는 야권이 단일화하라고 묘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야권의 단일화 실패가 패배의 원인이라는 방향으로 몰아붙이고 언론은 이에 가세하여 압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와 같이 귀착시켜 버렸습니다. 

물론 야권이 단일화 안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고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정치적, 도의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 선거를 자행하여 국민의 결정을 마음대로 왜곡시키는 등의 '국민주권의 말살행위'는 정치적, 도의적 과오일 뿐만 아니라 반역적인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주석 15)

이승만 정권의 3ㆍ15부정선거가 원시적인 수법이었다면 전두환ㆍ노태우의 13대 대선부정은 근대적이었다. 족벌신문ㆍ관영방송이 자발적으로 부정은폐에 나서고, 비판의 방향을 야권으로 돌렸다. 김후보의 말을 더 들어본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 당에 눈물겹고 정성어린 성금을 보내주었고 8만 명의 학생들과 2만 명의 재야인사들이 투표참관인 등으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거기에 8만 명이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의 깃발 아래 우리 당의 선거운동을 전국 도처에서 도왔습니다. 또한 3만 명의 자원봉사대원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불철주야하고 선거전에 투신했습니다.

이것을 일찌기 역사에 없었던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도운 사람들과 여의도와 보라매와 부산과 광주와 전주와 대전과 인천 등 전국 도처에 모였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선거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모두 몸져 눕고, 일손을 놓고, 슬퍼하고, 좌절감에 빠진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을 풀려다가 한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례 없이 심각한 국민적 갈등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수록 선거를 승리로 이끌지 못했으며 야권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저의 책임이 너무도 크다고 다시 한번 자책해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 고유의 정서인 한은 풀릴 때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이 한이라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특수한 감정 때문에 우리가 지탱해 온 것이며 또 앞으로도 지탱해 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주석 16)

평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고 야권분열이라는 질타를 받으며 믿었던 동지들로부터 등돌림을 당하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헌신해 온 재야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당의 체질을 바꾸고, 이들을 총선에 내보내어 선거열풍을 일으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13대 총선 결과 제1야당이 된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받고 있다.
 13대 총선 결과 제1야당이 된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받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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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당에 입당한 재야그룹은 문동환 등 교수 10명, 이상수 등 변호사 5명, 방용석 등 노동계인사 5명, 서경원 등 농민대표 3명, 우종범 등 빈민대표 7명, 고영근 등 종교계 3명, 민통련 등 민권운동계 인사 22명, 학생운동출신 40여 명, 고 이한열군 어머니 배은심 등 유가족 대표 2명 등 100여 명이었다.

평민당이 재야 명망가들을 대거 입당시키자 민주당은 "평민당이 혁신세력을 규합하는 등 보수야당의 색깔을 잃고 있다" 라는 색깔론의 성명을 내고, 민정당에서도 유사한 성명으로 재야인사들의 평민당 입당을 못마땅해 하였다.

김대중 총재는 퇴진 압력을 받고 박영숙 부총재에게 총재권한대행을 맡기고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1988년 2월 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전격적으로 총재직을 사퇴하여 야권의 통합을 호소하고 나섰다.

양당은 7인씩으로 야권 단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의했지만 각자의 이해가 맞지않아 야권통합은 결렬되고, 두 정당은 각각 총선체제를 갖추었다.

이 무렵 여야간에 국회의원선거법 협상이 개시되어, 평민당은 민정당과 민주당의 중선거구제안이 여야가 동반당선 하겠다는 유신시대의 낡은 사고발상이라 강력하게 비판하고, 인구 15만을 기준, 상한선 23만 하한선 7만으로 선거구를 확정하는 선거법안을 마련하여, 결국 소선거구제의 채택을 가져왔다.

국회의원 선거의 소선거구제 채택은 평민당의 재기를 불러오는 쾌거였다. 평민당은 중대선거구제가 유신잔재이며 소선거구제가 국민의 시대적 염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줄기차게 밀어부쳐 쟁취하였다.

제13대 총선이 4월 26일 실시되었다. 평민당은 지역구 대부분에 후보자를 공천하고 박영숙 총재 대행을 비례대표 1번으로 하고 김대중은 11번으로 등록했다. 11번까지 당선되기는 쉽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대 도박을 한 셈이다.

평민당은 대선 패배의 슬럼프를 벗고 총선준비에 돌입했다.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의 이름으로 1988년 4월 초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임하면서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첫째, 믿을 수 있는 야당의 위치를 흔들리지 않고 지켜나가겠습니다.
둘째, 강력한 견제세력이 되겠습니다.
셋째, 평민당은 안정과 개혁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정당입니다.
넷째, 평민당은 북방외교를 추진하며 통일의 문을 열겠습니다.
다섯째, 평민당은 지방자치제의 실현에 온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주석 17)

대선패배 이후 2선에 물러나 있던 김대중은 자당 후보자 지원 유세에 나섰다. 평민당 후보가 있는 곳은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ㆍ경상도ㆍ경기도ㆍ충청도ㆍ서울을 빠지지 않고 순회하였다.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견제세력을 뽑아서 노태우 정권을 감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6년 만에 소선거구제가 부활되어 실시한 총선은 예상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구 224석과 전국구 75석을 합친 총 299석 중 민정당 125석(전국구 38석), 평민당 70석(전국구 16석), 민주당 59석(전국구 13석), 공화당 35석(전국구 8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이 9석을 각각 차지했다.

정당정치가 정착된 이래 최초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한 기록을 남겼으며,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평민당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하고, 김대중은 제1야당 총재로 복귀하였다. 평민당은 총선의 득표율에서 3위에 그쳤지만, 호남선거구의 전승과 서울지역의 17개 의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이 되었다. 김대중은 1972년 유신쿠데타로 의원직을 빼앗긴 이래 16년 만에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평민당으로서는 든든한 구심점이 마련된 셈이다. 


주석
15> <제13대 대통령선거 부정백서, 조작된 승리를 고발한다>, <발간사>, 평화민주당, 1988.
16> 앞과 같음.
17> <평화민주당 - 1989년>, 평화민주당 발행, 285 ~ 28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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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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