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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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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그러니까 선거 당일이다.

김대중 후보는 투표를 마치고 평소 다니던 서교성당의 미사에 참석한 뒤 자택에서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 외신은 선거 뒤의 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앞으로의 일은 미리 얘기하지 않겠으나 모든 것은 국민의 생각이 어떠한가에 따라 판단할 것이다."

- 선거운동 기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 .

"대구집회에서 처음에는 일부 군중들이 돌을 던지다가 나중에 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던 때였다. 또 막판에 김종필 백기완 문제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잘됐고 선거자금 문제도 하느님이 도우셔서 그나마 꾸려나갔다."

- 후보간 TV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 .

"이번 선거에서 제일 잘못된 점이 바로 그 점이고 이를 거부한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에게 마땅히 불성실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투표 전날 저녁 예정되었던 효창운동장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였다. 이날 40대 남자가 효창운동장에 가면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 유신쿠데타, 5.17정변 당시 무명인의 제보가 어김없이 사실로 드러나서, 이날의 암살음모 제보에 측근들이 효창운동장 유세를 말렸다는 것이다.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가 자정 때까지 크게 우세하자, 쿠데타세력 일각에서 윤보선 저격 움직임이 있었던 것과 유사한 배경이었다.
 
1987년 11월 15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대구 집회와 11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 유세. 노태우 후보는 돌이 날아올 것을 알고 미리 방탄유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1987년 11월 15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대구 집회와 11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 유세. 노태우 후보는 돌이 날아올 것을 알고 미리 방탄유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 MBC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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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후보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 무렵에 평민당에 긴급 첩보가 접수되었다. 서울 구로구청에서는 구로구 선거관리위원회측이 부정투표함을 식빵상자에 감춰 밀반출하던 것을 달려간 평민당원들에게 발각되었다. 투표위조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구청 3층의 선관위 사무실로 달려간 평민당원과 시민ㆍ학생들에 의해 투표함 1개ㆍ붓뚜껑 60개ㆍ새 인주 70개, 정당대리인 도장 ㆍ인주가 묻어 있는 장갑 6켤레ㆍ백지투표용지 1,506매가 발견되고 붓뚜껑에서 인주가 선명하게 묻어나와 방금 사용한 흔적이 뚜렷하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5천여 명의 시민ㆍ학생들은 문제된 투표함의 공개 개봉을 요구하고, 오후에는 부정투표에 항의하여 농성에 돌입했다. 
 
87년 구로구청사건의 도화선이 된 구로을 투표함 개함
▲ 29년 만에 열린 구로을 투표함 87년 구로구청사건의 도화선이 된 구로을 투표함 개함
ⓒ 강동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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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수천 명의 시민ㆍ학생이 몰려와 부정선거규탄대회를 열며 농성을 하자, 전두환 정부는 다음날 새벽 4천여 명의 무장경찰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에 들어가 시민 1천여 명을 연행하고, 5층 옥상의 폭력진압과정에서 추락한 학생이 하반신이 마비되는 등 많은 중상자가 발생했다.

서울의 중심지에서 대낮에 벌어진 부정투표 현장이 드러나고 이것을 폭로 항의한 시민 학생들이 무참하게 구타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이 이지경이었을 때 다른 지역에서는 어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현상이었다.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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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정선거는 대부분 묻히고 말았다.

투표 결과가 참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태우가 유효투표의 36.6%인 828만 2,738표를 얻어 당선되고, 김영삼은 28.0%인 633만 7천여표, 김대중은 27.0%인 611만 3천여표, 김종필은 8%인 182만 3천여표를 얻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3위에 불과했다. 서울에서는 4명의 후보 중 1위를 차지했지만 예상했던 경기도 등에서는 저조한 득표에 그치고 말았다.

패배의 원인은 야권분열과 정부의 관권개입과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살포, 여기에 박정희 - 전두환정권 25년 동안 김대중 후보에게 덧씌워진 용공음해와 과격성 등이 때마침 벌어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과 김현희의 압송으로 빚어진 공안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평민당은 좌절의 늪에 빠졌다.

김대중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김영삼과 후보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자신이라도 사퇴할 것을, 그렇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러나 단일화가 되었으면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에는 의문을 달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선거에 입후보했던 일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국민의 염원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양보해야했다. 야당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염원을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솔직한 심경으로 반성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단일화를 했어야 이길수 있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당은 정치자금을 독점하는 한편 야당에 돈이 유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체크를 했던 게 우리의 실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매스컴이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에는 주간지 하나도 지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마지막 투개표에 관한 모든 부정을 대통령이 임명한 공무원들이 맘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야당이 아무리 후보를 단일화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1963년과 1967년에도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 후보 한 명 뿐이었다. 1971년에도 대통령 후보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당에서는 후보 한 명을 밀었는데도 모두 졌다. 이번에는 두 명이 나온 탓에 졌다고 한다면 한 명 때는 왜 졌는가? 역대 정부는 후보가 한 명일 때든 두 명일 때든 관계없이 그에 맞춰 부정을 저지르면 되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선거 패배 직후 한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진솔하게 당시의 심경을 토로했다.

나는 여의도나 보라매공원에서 보여준 엄청난 국민의 함성과 나와 함께 서너 시간씩 카퍼레이드를 할 때의 열기 등등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선거의 결과가 저렇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나는 출마할 때도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기도 속에서 출마하는 것이 옳다는, 출마가 불가피하다는, 즉 나에 대해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한 맺힌 소망을 생각할 때 출마가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출마 전후와 선거 과정을 통해 김영삼 총재와 나 둘 중에서 한 사람이 나가는 단일화가 되도록 내 자신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 점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나에게 기회를 주시리라 믿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못돼서 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냐 하는 반성을 크게 했습니다.


주석
10> <동아일보>, 1987년 12월 16일.
11> <김대중자서전(2)>, 218쪽.
12> 이상문, 김대중 인터뷰, <참 부끄럽게 됐습니다>, <월간경향> 1988년 2월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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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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