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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6명의 육군관계자와 1명의 문관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해군 인사 중 사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전쟁범죄로 기소된 일본측 피고인들 1948년 11월,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6명의 육군관계자와 1명의 문관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해군 인사 중 사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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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12일,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 측 피고인들의 책임을 묻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판결문이 비로소 낭독됐다. 전쟁이 끝난 지 3년, 재판이 시작된 지 2년 반 만의 일이었다.

'도쿄재판'으로도 불리는 이 재판의 결과, 제국 일본이 강행해 온 침략전쟁의 정점에 서 있던 것으로 평가된 7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전쟁을 기획하거나, 포로와 민간인의 인권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는 것. 단호한 사형판결을 통해 도쿄재판이 세상에 던지는 교훈은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명확한 교훈의 이면엔 도저히 덮을 수 없는 도쿄재판의 모순이 도사리고 있었다. 과연 재판부는 전쟁의 기획과 반인륜적 범죄에 연루된 피고인들을 공정하게 솎아냈던 것일까. 사형 선고를 받은 7명 중 6명은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전 총리를 위시한 육군 인사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문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전 총리였다. 해군 인사 중 사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해군이 육군과 함께 전쟁을 지탱하던 양대 축이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해군 인사들이 전원 극형을 피하는 데 성공한 도쿄재판 결과는 선뜻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해군 역시 주체였음에도

비록 육군의 압력이 컸다고는 하지만, 해군 역시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적극적으로 획책한 주체였다. 지상전 위주의 중일전쟁에서 소외돼왔던 해군 군령부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개전할 시 주전장은 바다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개전 계획이 엉성하며 현실성 없다는 비판이 해군 내부에서도 제기됐지만 소용없었다. 즉, 해군은 오직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할 요량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승산 없는 전란 속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관련 기사: 일본이 풀어야 할 괴로운 '근본 질문').

무모하게 시작한 전쟁은 당연하게도 파국으로 치달았다. 치명적인 패배, 보충 불가능한 소모가 반복됐다. 마지막 사활을 걸었던 1944년의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까지 참패하면서, 해군에 의한 정상적인 작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정상적인 작전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몰락했음에도, 해군은 무의미한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 계속에 집착했던 해군의 의지는, 국민의 생명을 던져 자폭 공격을 벌이는 이른바 '특공'으로 귀결됐다(관련 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요컨대, 일본 국민들은 물론 아시아 각국의 민중들에게 끔찍한 출혈을 강요했던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있어, 해군이 갖는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재판은 단 한 명의 해군 인사도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 육군에서만 6명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제2복원성'의 숨은 임무
  
제2복원성은 해군 장병들의 귀국 및 민간사회 복귀를 업무로 내걸었으나, 물밑에서는 전범재판에 기소된 해군 지도부 인사들을 구명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힘썼다.
▲ 해군성 폐지와 제2복원성의 설치 제2복원성은 해군 장병들의 귀국 및 민간사회 복귀를 업무로 내걸었으나, 물밑에서는 전범재판에 기소된 해군 지도부 인사들을 구명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힘썼다.
ⓒ <쇼와사 제12권>마이니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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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30일을 기해 일본 육해군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그다음날, 내각에서 육군과 해군의 군정을 맡아오던 육군성과 해군성은 각각 '제1복원성'과 '제2복원성'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들 제1, 2복원성의 임무는 장병들의 귀국 및 민간사회 복귀(복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2복원성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 해군 군령부 참모들은 공식적인 임무 외에 또 다른 과업을 숨기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범재판에 대한 대책 마련'이었다.

그들은 전범재판을 '연합군에 의한 일방적인 보복'으로 인식했고, 이 불공정한 재판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후 일본을 사실상 통치하게 된 연합군최고사령부는 구 군인들이 전범재판 대책 마련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제2복원성은 연합군의 눈을 피해 음지에서 움직였다.

제2복원성에서 전범재판 대책의 총괄을 맡은 것은 도요타 쿠마오(豊田隈雄) 전 대좌였다. 해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 전쟁 당시 나치 독일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던 도요타 전 대좌는 해군에서 손꼽히는 수재였다. 연합군의 부당한 복수로부터 해군 조직을 구해낸다는 사명감으로 중책을 맡은 그는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고 한다.
  
도요타 전 대좌는 전범재판에서 해군 인사가 사형되는 일을 막아냈지만, 재판 대책을 준비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일본 해군의 과오와 범죄를 숱하게 마주하였다. 그는 이후 전국에서 전범재판 자료를 수집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 제2복원성에서 전범재판 대책을 책임졌던 도요타 쿠마오 전 대좌 도요타 전 대좌는 전범재판에서 해군 인사가 사형되는 일을 막아냈지만, 재판 대책을 준비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일본 해군의 과오와 범죄를 숱하게 마주하였다. 그는 이후 전국에서 전범재판 자료를 수집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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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재판업무, 그것이야 말로 나의 전장이며, 이제부터가 나의 전쟁이다."

그는 전후의 해군반성회에서 전범재판 대책을 마련하던 당시의 계산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전쟁재판이라는 것은 종래 보통의 재판과 다르니까, 어떻게든 강화조약(연합군의 통치 종식, 일본의 주권 회복)까지 (버티자고 생각했습니다). 사형만 되지 않는다면, 종신형이 된다 해도 강화조약까지 버티면 그것으로 자유의 몸이 되니까..."

이미 전쟁 기획의 책임을 묻는 '평화에 대한 죄'를 면할 수는 없었으므로, 사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선의 반인륜적 범죄와 관련된 '통례의 전쟁범죄', 즉 BC급 전범 항목에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러나 연합국 검사들은 바다에서 구조된 연합국 상선 승조원들이 일본 해군에 의해 살해된 사건, 일본 해군 부대에 의한 포로나 민간인 처형 사건 등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검사측은 이 일선의 전쟁범죄들의 배후에 해군 군령부가 있을 것으로 봤다.

결론부터 논하자면, 당시 제기되던 전쟁범죄의 배후에 해군 군령부가 있을 것이라는 검사 측의 주장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사실 혹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제2복원성의 재판 담당자들은 재판에서 증언할 수 있는 인사들을 빼돌리거나 일선 부대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재판부의 칼날을 피했다.

일선 장병들에게 지워진 책임... 천황을 위하여

해군 군령부에게 돌아갔어야 할 책임은 그렇게 일선의 장병들에게 지워졌다. BC급 전범재판으로 사형된 해군 군인은 약 200명, 이들 중 다수는 젊은 하급장교와 하사관들이었다. 최고 지도부의 면피를 위해 일선의 장병들만 희생된 사태에 대해 유족들이 분노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제2복원성이 주도한 증거인멸, 위증, 책임전가 등은 윤리적으로 쉬이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중심에는 전쟁 내내 '지켜야 할 국체' 그 자체로서 신앙의 대상이 됐던 쇼와 천황이 있었다(관련 기사 : "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맥아더 사령부는 원활한 일본 통치를 위해서는 쇼와 천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에 관한 문책은 도조 히데키 전 총리와 육군에게 집중되었다. 한편, 제2복원성은 천황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옛 해군 지도부 인사들의 구명에 나섰다.
▲ 맥아더 사령관과 쇼와 천황(1945년 9월 27일) 맥아더 사령부는 원활한 일본 통치를 위해서는 쇼와 천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에 관한 문책은 도조 히데키 전 총리와 육군에게 집중되었다. 한편, 제2복원성은 천황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옛 해군 지도부 인사들의 구명에 나섰다.
ⓒ US Army photo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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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재판을 앞에 두고서, 제2복원성은 '천황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해군)중앙부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현지 사령관 정도로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즉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이 연합군에 의해 문책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황이므로,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는 천황과 바로 직결된 해군 지도부 인사들의 책임이 부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해군 지도부 인사들이 '천황을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은 셈이다.

제37대 총리대신을 지낸 최후의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米内光政) 대장은 쇼와 천황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할 필요성에 대해 맥아더 사령부에 적극적으로 타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나이 대신은 맥아더 사령관이나 그의 참모들과 접촉할 때면 천황의 존재가 '일본에서의 점령정책을 원활히 실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요나이 대신의 설득에 수긍했고, 천황이 재판에 넘겨지면 일본을 통치하는 자신들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진다'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천황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일본 측에 의해 입증되는 것은 맥아더 사령부에 있어 도쿄재판의 가장 바람직한 결론이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어제의 적들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이제 맥아더 사령부는 제2복원성, 즉 일본 해군의 전쟁책임 은폐를 응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조(와 육군)에게 모든 책임을 지운다'는 맥아더 사령부의 화답을 받아 든 요나이 대신과 옛 해군의 지도자들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전쟁을 향해 폭주하는 육군,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해군 그리고 실권없이 무력하며 또한 그렇기에 전쟁책임으로부터 무결한 천황의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951년 해군관계자에 대한 모든 재판은 끝났고 최초에 설정된 '사형만은 면한다'는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됐다.

전범재판 대책 책임자 도요타 전 대좌가 전망했던 바 그대로, 종신형 등을 선고받았던 해군 인사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빠르게 석방됐다. 전쟁책임을 두고 벌어진 제2의 전쟁은 일본 해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희석된 전쟁 책임
    
해군은 육군과 더불어 전쟁의 시작과 전개를 주도하였다. 전후, 해군 지도부는 육군 지도부나 일선의 해군 부대에 전쟁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살길을 찾고자 했다.
▲ 도조 히데키 수상과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대신 해군은 육군과 더불어 전쟁의 시작과 전개를 주도하였다. 전후, 해군 지도부는 육군 지도부나 일선의 해군 부대에 전쟁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살길을 찾고자 했다.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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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이때의 승리를 이끌어냈던 도요타 대좌는 해군 지도부의 전쟁책임 회피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전범재판 대책 마련을 위해 다방면에 걸쳐 발로 뛰면서 자료를 수집한 결과, 그가 알지 못했던 일본 해군의 여러 어두운 면들에 대해 비로소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전후에 열린 해군반성회에서 도쿄재판 이후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거의 2년 반에 걸친 심리를 통해 가장 안타깝게 여겨진 것은, 해군은 항상 정밀하게 사고하면서도 그것을 국책에 반영시키는 용기가 부족했고, 결국 전쟁, 패전으로 나라를 잘못 인도하기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육군은 폭력범, 해군은 지능범입니다. 어느 쪽이든, 육해군만 있는 줄 알고 (정작 그 위에) 나라가 있다는 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패전의 책임은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는 '해군이 육군과 나란히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점' 또한 꼬집었다. 도요타 전 대좌는 이후 정략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넘어 일본 해군의 명암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목표로 일본 각지에서 전범재판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며 여생을 보냈고, 1995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도요타 전 대좌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남긴 반성 어린 메시지에도 당시에 희석된 전쟁 책임은 여전히 그 윤곽선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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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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