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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동엔 옛 추억 속에서 잠들 수 있는 한옥 숙소가 많다.
 경주 황남동엔 옛 추억 속에서 잠들 수 있는 한옥 숙소가 많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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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여행이 처음인 사람이든, 여러 차례 방문한 이들이든 마찬가지다. 경주 톨게이트 위에 근사하게 올라앉은 기와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도시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수십 년 전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아본 세대에겐 아련한 향수를 선물하고,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연립 주택에서만 지내온 아이들에겐 감탄을 부르는 풍경.

경주에서는 기와를 얹은 한옥(韓屋)을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관공서와 대형 카페도 기와지붕이 흔할 정도다. 이런 형국이니 한옥은 '서라벌을 서라벌답게 보이게 하는' 매력적인 보물의 하나가 분명해 보인다.

시멘트나 벽돌이 아닌 나무가 주된 재료이기에 방에서 풍기는 향기부터가 현대식 주택과는 다른 한옥에서 하루쯤 머물고 싶다는 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의 희망사항이다.

경주 관광업계는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발맞춰 다양한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 체험을 준비해놓고 있다.

한옥의 멋스러움을 찾아 경주 황남동으로

나 또한 몇 해 전 이끼 낀 오래된 검은 기와 위로 산새가 날아드는 안동 고택(故宅)에서 보낸 시간이 즐겁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기에, 경주의 한옥에서도 한 번쯤 달콤한 잠을 청해보고 싶었다.

한옥 숙소는 물론, 살림집과 식당으로 사용되는 도시형 한옥이 즐비하다는 황남동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도보로 15~20분 거리. 낯선 도시에서의 가벼운 산책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그런데 어째서 타 지역에서는 사라진 한옥이 황남동엔 아직 다수 남아 있거나, 심지어 새롭게 만들어지기까지 하는 것일까? 한국건축역사학회가 발행한 논문 <경주시 황남동 일대 한식 건물 주거지 형성에 관한 기초 조사연구>는 이런 궁금증의 한 부분을 풀어주고 있다.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서는 오히려 1970년대에 한식 건물이 대량 건설되어 같은 시기 타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목조 외에 다양한 재료를 수용한 한식 건물이 도입되어 1980~1990년대 신축의 주류를 차지하는 특수한 건축적 맥락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런 현상의 저변에는 1970년대부터 공공 차원에서 주거지 정비를 통한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려는 기획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황남동의 경관 구축 과정은 그 성격에 따라 1960년대까지의 주거지 형성, 1970년대 역사적 경관 성격 부여, 1980~90년대의 비목조 한식 건물의 정착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옥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는 건 경주 여행의 매력 중 하나다.
 한옥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는 건 경주 여행의 매력 중 하나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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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키워드는 '공공 차원에서 주거지 정비를 통한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려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경주는 누가 뭐래도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 도시'다. 바로 이 '역사'를 도시 발전에 기여할 관광 콘텐츠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한옥의 보존과 현대적 리모델링을 택한 것이 아닐지. 이런 추론에 힘을 실어주는 건 앞서 언급한 논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1979년 발표된 '경주 구시가지 및 사적지 정비계획'은 문화유산과 상업 및 주거 기능이 혼재된 경주의 도시 구조에서 핵과 핵 사이를 연결하는 중심가로를 고도(古都·역사가 오래된 도시) 이미지에 맞게 개발하여 활성화를 유도할 것을 목표로 하는 계획이다…."

국가 차원에서 보존해야 할 유적과 유물이 다수 존재하는 경주. 그것들을 중심으로 관광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기에 여타 지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게 된 '독특하고 고풍스런 공간' 황남동으로 들어섰다.

얼마 전 내가 묵었던 숙소는 1층과 2층에 각각 4개의 방을 갖춘 신축된 한옥 양식의 건물. 바닥에서 천장까지가 꽤 높아 쾌적하게 느껴졌다.

그 많던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

딸과 함께 경주로 여행 왔다는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숙소 방문을 열어보더니 "내가 어릴 땐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나무와 황토로 만든 한옥에서 살았는데, 어쩌다 그런 집들이 이젠 다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할머니의 푸념을 들었던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의 한국 도시에서 '한옥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했을 터.

그 의문에 최무현의 논문 <경주지역 도시 한옥의 시대별 건축 특성에 관한 연구-황남동 한옥보존지구를 중심으로>가 이런 답을 내놓고 있다.

"한옥은 삼국시대와 고려조를 거쳐 조선왕조 500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삶과 혼, 그리고 정체성을 담아온 귀중한 생명체와 같았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은 서구 문화의 급속한 유입을 불러왔고,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의식과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외래 주거문화인 양식 및 일식 생활 패턴의 유입은 전통한옥을 외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세상 모든 사물의 내부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옥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반영했기에 한옥엔 포근함과 따스한 서정이 깃든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몸이 느끼기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새롭게 지어지는 경주의 한옥은 부엌과 화장실 등이 젊은 세대의 요구에 맞춰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지고 있는 추세다. 이는 변화하는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클래식과 모던의 결합'이 아닐까 싶다.

우리 일행이 하루를 보낸 한옥 숙소 역시 외형은 전통방식을 따르면서도 내부는 편리함을 지향하는 형태를 보였다. 오래전 한옥과 달리 방 안에 샤워기와 양변기를 갖춘 욕실이 있고, 침대도 놓여 있었던 것.
 
최근엔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춰 한옥 숙소도 진화하고 있다. 깔끔하게 꾸며진 경주 한옥 숙소 내부.
 최근엔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춰 한옥 숙소도 진화하고 있다. 깔끔하게 꾸며진 경주 한옥 숙소 내부.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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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내부는 현대적으로, 외부는 고전적으로 꾸며진 한옥 숙소에서의 하룻밤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옆방의 소리가 다 들린다"며 방음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각자의 방에 든 여행자들은 밤이 깊어지자 서로가 조심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자정 무렵. 조용히 마루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의 외갓집은 시골에 있었고, 외숙부와 이모는 낡은 한옥에서 생활했다. 40년 전 난 먼 산에서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가 겁나서 방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혼자 가지 못하고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곤 했다. 귀찮다는 기색 없이 아들의 손을 잡고 선선히 마당으로 내려서던 젊은 시절의 엄마.

캄캄한 밤하늘에서 점점이 빛나던 수많은 별과 착한 눈망울을 가진 소를 키우던 외양간 마른 풀 냄새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세상의 어두움을 보지 못하고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유년. 우리 모두는 그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됐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가?

이제 더 이상 새의 울음소리 따위에 겁먹지 않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허위허위 살아가는 소시민.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묵은 추억을 꺼내 보게 하는 경주 한옥 마루에서의 상념이 사람을 나른하고 섬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쁠 것 없었다. 여행이란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기도 하기에.

황남동 한옥 숙소에 누웠던 그 밤.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몸과 마음 모두가 창호지를 통과한 햇살에 눈 비비며 일어나던 유년의 아침처럼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제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경주, #한옥, #황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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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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