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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아래 깨 털기
▲ 깨떨기 가을 하늘 아래 깨 털기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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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비 예고에 금요일로 깨 터는 날을 정해야 했다. 점심을 준비해서 밭에 도착하니 아빠는 다 베어서 말려놓은 깨 나무 더미를 나르고 있었고 넓지막한 포장 위에서 엄마는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웃는 엄마 아빠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내 눈에는 밀레의 <이삭 줍기>나 <만종>과는 급이 다른 명작이라고나 할까.

그 순간 그냥 이유 없이 감사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순하게 살아온 생, 저 여자 남자가 내 엄마 아빠라는 것이 감사했다. 가을 황금 햇살이라서 감사했고 우리 셋이 오늘 슬플 일 없이 깨를 털 수 있는 것에도 감사했다. 이대로 하루를 누리고 싶을 뿐, 모든 욕심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양이 많지 않아서 가볍게 방망이로 두들기기로 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앞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수다 담당인 나는 그 추억을 끄집어냈다. 나는 엄마 아빠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좋다.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흰밥 같은 것이 바로 엄마 아빠의 이야기라고나 하까.

"먹게."
"가게."


내가 없다면 아마 엄마 아빠는 종일 딱 두 마디 하실 게 분명하다. 며느리에게 쏘이는 봄볕과 다르게 가을볕은 딸에게 쏘인다는데, 깨가 어찌 잘 말랐는지 바삭하니 조금만 건드려도 후두둑 떨어진다. 아빠가 깨 나무 더미를 들고 나를 때 깨알이 밭에 떨어지기도 하는 건 어쩔 순 없고, 방망이질할 때 깨가 포장 밖으로 튀어 나가진 않아야 했다.

왼손으로는 깨 나무를 두어 개 모아 잡고 돌려가며 오른손으로 꼼꼼하게 두들겼다. 처음에는 얼마큼 두들겨야 깨가 다 떨어지는지를 모르겠어서 두들기다 말고 깨알이 들어 있는 꼬투리를 가끔 손으로 벗겨보기도 했다.

고추를 딸 적마다, 동부콩을 딸 적마다 바람이 깨밭을 거쳐 우리에게로 불어오면 깻잎 냄새가 기가 막혔다. 깨밭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마치 들기름 샤워라도 하는 황홀경이었다.

부엌 살림을 거의 하지 않는 나의 경우, 나물 무칠 일이 없어도 들기름을 냉장고에 귀하게 모셔놓는 이유는 가끔 입맛 없을 때 곧잘 맨밥에 비벼먹기 때문이다. 고급진 느끼한 맛에 김치 하나만 놓고 먹으면 참 좋다.

깻잎은 우리나라만 먹는다는 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참깨와 들깨도 구별 못했었다. 우리가 반찬으로 먹는 깻잎은 들깻잎이라는 것이고 지금 내가 털고 있는 것이 들깨라는 것도 어찌나 헷갈리던지 몇 번을 아빠에게 물어야 했다.

들깨 구별 정도는 했을 즈음에 생기는 또 다름 궁금증. 깨밭의 고소한 바람에 코가 벌렁거릴 때에도 전혀 궁금하지 않던 것이 방망이질에 깨알이 눈앞에서 쏟아지니 궁금해졌다.

"아빠, 그럼 왜 우리는 참깨를 안 심고 들깨를 심었어?"

아빠 말로는, 참깨는 키가 작고 가지가 많지 않아 풀이 잘 자라니 밭메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에 비해 들깨는 키가 크고 가지가 우거져서 응달 그늘에 풀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적고 재배가 쉬워서 들깨를 심는 것이었다.
 
작물 따라 파종방법이 다 다르다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작물 따라 파종방법이 다 다르다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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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감동하는 여러 가지 중에 하나는,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그 많은 야생식물 중에 이렇게 맛있는 것을 식량으로 작물화하는 데 성공했을까?'라는 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 이동을 하여 만 년 전 그 현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실패와 희생 끝에 처음 성공한 그 누군가는 첫 열매에 얼마나 감탄했을까? 그게 인류 농업혁명의 시작이란 것을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갈수만 있다면 가서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사피엔스>와 <총균쇠>에 따르면, 당신의 성공 덕분에 인간이 고된 유목생활을 끝낼 수 있었고 인류가 기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인구가 늘었고 먹여 살리기 위해 계속 더 더 일해야만 했다고. 그 덕에 잉여 식량을 저장하게 되었고 전쟁과 신분과 계급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도 우리 인간은 불행하기도 하다고.

그리고 작물 따라 파종 방법이 다 다르다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우리 밭에 심었던 것만 해도 10가지가 넘는데, 시금치는 종자를 흩뿌렸고, 고구마는 줄기 모종으로 심었고, 마늘은 우리가 아는 통마늘 알로 심었다. 옥수수도 옥수수알로 , 땅콩도 땅콩 알로, 감자는 통감자를 조각 내서 싹 난 곳이 위로 해서 심었다. 양파와 파는 이게 풀인가 싶을 정도의 작은 모종을 심었다.

특히 알로 심는 감자나 마늘 경우, 이게 먹으면 음식이고 심으면 종자가 되는 현상도 너무 경이롭다. 죽은 것 같은 것이 어떻게 땅속에 들어가서 싹을 틔울까? 그저 음식 재료로만 보이는 것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니... 우리 영장류들이 겸손해지는 순간이다.

암튼,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심고 내가 떨어낸 이 깨알에서 들기름이 나온다니 대체 얼마나 고소할까. 신혼부부 달달할 때 잘 쓰는 말... 아, 나도 깨 볶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깨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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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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