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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노태우씨 국가장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29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노태우씨 국가장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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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속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이 마무리되었다. 비록 병상의 그가 유족을 통해 광주 5·18에 대해 사죄 의사를 표명했다 하나 자신의 과오를 밝힐 수 있었던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침묵했다. 2011년 펴낸 그의 회고록에는 5⸳18의 책임을 광주시민들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지난 30일 열린 영결식에서 김부겸 국무총리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적으로 88 올림픽, 북방외교 등을 거론했다. 보수야당의 대권후보는 범죄와의 전쟁이 조직폭력배를 척결하고 사회병폐를 일소한 쾌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난 좀 다른 기억이 있다. 특히 범죄와의 전쟁과 관련해서는 말이다.

난 백골단이 됐다

1990년 6월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입대를 했다. 6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전투경찰이 되었다. 배치된 곳은 다니던 학교와 가까운 동대문의 제1기동대였다.

전투경찰제도는 1970년 대간첩작전 수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2년 의무경찰제도를 도입하며 법 개정을 통해 대간첩작전 외 치안업무보조를 임무로 추가했다. 이후 전·의경들은 각종 집회와 시위 진압에 본격적으로 동원되었고 이는 군사독재정권이 실질적으로 군대를 동원한 사회통제, 민주주의 탄압의 수단으로 전·의경 제도를 악용했음을 의미한다. 실제 당시 전·의경들은 스스로를 군인으로 여겼고 규율하는 전투경찰대 설치법 역시 군대와 같은 강한 상명하복과 처벌을 규정하고 있었다.

기동대에 배치되고 나서 나는 다니던 학교는 물론 사회 곳곳의 집회와 시위 진압 작전에 동원되었다. 그러던 중 1990년 10월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범죄와의 전쟁은 조직폭력배 소탕에 국한되지 않은 전 사회적인 공안 정책이었다.

집회, 시위 진압 작전이 끝나면 우린 방범근무에 동원되었다. 무차별적인 불심검문이 진행되었고 우린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의 주머니를 뒤지고, 학생들의 가방을 뒤집고, 신분증을 꺼내 신원조회를 했다. 경범죄 위반자들, 향군법 위반자들, 불온서적 소지자들 등. 중대마다 그래프가 그려졌고 적발실적이 적은 중대는 외출, 외박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이던 학생운동을 겨냥했다. 1991년 4월, 집회 및 시위 진압 방침이 바뀌었다. 기존의 해산 위주에서 검거 위주 작전으로.

전 전경중대의 1/3을 사복체포조로 편성했고,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백골단'이 되었다. 고참 전경들은 검은 테이프로 감은 쇠파이프를 들고 진압 작전에 나섰고, 방패는 방어수단이 아닌 공격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진압은 공격적이었고 저항은 격렬해졌다.

양심선언
 
 
1991년 5월 4일, 연세대학교에 있던  ‘고 강경대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 서울 제1기동대 박석진 일경 모습
▲ 박석진 양심선언 모습 1991년 5월 4일, 연세대학교에 있던 ‘고 강경대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 서울 제1기동대 박석진 일경 모습
ⓒ 박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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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전경 사복체포조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예견된 사건이었다. 진압 작전 중 소식을 접하고 든 첫 생각은 '우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구나'였다.

강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난 길고 고통스러웠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1년 5월 4일, 강경대의 죽음으로 촉발된 분노는 더 많은 시민을 거리로 나서게 했고, '백골단 해체의 날'이라는 이름의 가두 투쟁이 있던 날 나는 양심선언을 했다.

내가 했던 일은, 노태우가 내게 시켰던 일은, 국방의 의무도 아니었고 시민의 자유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한 일도 아니며 단지 군사정권의 하수인이자 방패막이일 뿐이었으니까.

강경대 타살사건으로 촉발된 1991년 5월 정국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남대생 박승희, 안동대생 김영균, 경원대생 천세용, 한진중공업 박창수, 부평의 노동자 이정순, 광주의 버스기사 차태권, 보성고등학교 학생 김철수, 건설노동자 정상순, 성균관대생 김귀정 등. 노태우 정권은 더 나아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활동가이던 김기설의 분신을 유서대필사건으로 조작하며 잔악하고 비열한 통치를 멈추지 않았다. 그 고통들이, 그 죽음들이 노태우가 대통령이던 시간대에 있었다.

영결식장에서 김부겸 총리는 "고인의 재임 기간 많은 공적이 있음에도 애도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라며 "과거는 묻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만들어 가는 역사로 늘 살아있다"고 말했다.

죽은 후, 국가의 예우를 받는 노태우를 보며 '묻힌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라는 말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29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노태우씨 국가장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29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노태우씨 국가장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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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서울광장에 고 노태우씨 국가장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29일 오전 서울광장에 고 노태우씨 국가장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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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입니다.


태그:#노태우, #군사정권, #분신정국,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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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대한 감시와 비판적 제언'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Civilian Military Watch)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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