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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하상춘
 증언자 하상춘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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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춘·하옥희의 아버지 하수홍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11월 5일경 부역혐의로 경찰에 의해 불법학살됐다. 하수홍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장을 맡긴 했지만 지주 학살을 막는 등 인심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수복된 대한민국 군경은 하수홍을 그대로 두지 않았고 끝내 목숨을 빼앗았다. 남은 하씨 가족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말똥을 사람이 먹었다

1950년 겨울, 중공군 참전으로 또다시 난리가 났다. 이른바 '겨울 난리'다. 지난 여름 난리에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부역혐의로 줄초상이 났던 충남 아산군 영인면 신운리 사람들은 모두 짐을 싸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하옥희(1940년생)의 회고담이다.
 
짧은 해는 겨울을 재촉했고 눈도 많이 와 온 천지가 하얗다. 동네 앞 신작로에는 피난민들이 줄을 지어 가기 시작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떼를 지어 내려왔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초죽음이 되어 밀려왔고, 손과 손에 끈을 메고 가는 사람, 짐 위에 아이를 올려놓고 가는 사람, 마차에 짐을 가득 신고 가는 가지각색의 피난민들은 어두워지면 피난 간 빈집에 들러 자고 또 떠났다.(하옥희, <무한한 인내심을 길러주신 엄마>)

하옥희는 피난짐을 싼 지 10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이곳저곳에 하얀 솜뭉치가 보여 '이게 뭐지?'하며 만져본 하옥희는 "앗. 더러워" 하며 침을 퉤퉤 뱉었다. 다름 아닌 말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어 며칠을 굶은 옥희는 말똥을 주워다 씻은 다음 절구에 빻았다. 말이 소화시키지 못한 곡물을 빻아 죽을 끓여 먹었다. 짐승이 배출한 것을 사람이 먹는 형국이었다.

창호지가 뜯겨져 나간 문틀을 한 집은 폐가나 다름 없었다. 지난 가을 아버지 하수홍이 부역혐의로 학살된 후 대한청년단원들은 이불 호청이며 가재도구를 모두 가져갔다. 숟가락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그해 겨울 솜이불 하나로 온 가족이 추위를 견뎌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발이 솜을 뚫고 나와 솜이불에 구멍이 숭숭 났다. 김이예는 막내(1948년생)를 딸 하상윤(당시 12세)에게 업혀 놓고, 장사 길에 나섰다. 밴댕이를 바닷가에서 받아다가 집집이 다니며 팔았다.

1950년 긴 겨울이 가고 1951년 봄이 왔다. 날씨는 따듯해졌지만 김이예 가족의 살림은 펴지지 않았다. 봄이 되면서 장남 하상춘은 공주농업중학교에 다니느라 집을 떠났고, 하상년(당시 15세)도 공주사범 병설중학교 2학년에 복학했다. 집에는 어린 딸 셋과 아들 하나만 남았다.

51년 들어 두부 장사를 시작한 김이예는 매일 집을 비웠다. 남겨진 아이들은 매일 산으로 들로 나갔다. 밭뚝, 보리밭, 산자락으로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뜯었다. 그 중에서 광주리나물(광대나물), 국수나물을 제일 많이 뜯었다. 쑥은 싹이 파릇파릇 돋을 때는 뿌리까지 캐먹다가 조금 자라면 잎만 뜯어 쑥개떡을 해 먹었다.

김이예는 두부장사를 시작으로 자녀들이 캐 온 봄나물, 우렁이를 2km 떨어진 백석포 새벽시장에 내다 팔았다. 돈이 모이면 장남 하상춘에게 학비로 보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남을 제대로 가르쳐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심산이었다.

뼈만 남았던 그해 여름

봄나물 캐기가 끝나면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됐다. 김이예와 어린 자녀들이 못자리 만들기에 도전했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그래도 김이예는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일꾼을 사지 않고 가족의 힘만으로 못자리판을 만들었다.

당시 집 나이 열두살이었던 하옥희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보리 베기와 김매기였다. 보리를 베어 묶은 다음 하옥희는 보리단을 이고, 동생 하상기(집 나이 9세)가 지게로 날랐다. 하상기 키보다 지게가 더 커, 지게다리가 땅에 닿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특히 보리수염이 부서져 옷 속으로 떨어지면서 살 속으로 파고들어, 껄끄럽고 생채기를 내기 일쑤였다. 땀으로 범벅된 몸에 부스러기가 들어가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다.

힘겨운 봄철 농사가 마무리될 즈음 하상윤과 하옥희가 장티프스에 걸렸다. 김이예의 두 딸은 윗방에 격리되어 고열과 싸웠다. 아이들이 아픈데도 김이예는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이 굶어 죽을 판이었다. 김이예는 나무 주발에 꽁보리밥을 퍼서 고추장 종지 하나와 숟가락 두 개를 윗방에 디밀어 놓고는 일을 나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딸들은 열이 내렸다. 쌀죽을 먹고 겨우 일어난 옥희는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눈은 화등잔만해졌다. 말 그대로 뼈만 남았다. 두 딸을 잃을까 애간장을 태운 김이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하상윤·옥희 자매는 다시 논으로 밭으로 나가 일을 거들었다.

1951년 가을 벼베기가 끝나자 김이예 가족은 방죽을 막아 물을 가두고 다음 해 농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장마비가 쏟아져 논에 세워둔 볏단이 목만 남았다. 갑자기 찾아온 동장군으로 인해 논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김이예는 작대기로 얼음을 깨며 논두렁으로 볏단을 나르고, 어린 자녀들은 뚝위에서 이를 받아 산모퉁이에 나란히 세웠다. 이 와중에 막내(딸)가 감기로 시름시름 앓더니, 세상을 떴다. 그렇게 가장 하수홍을 잃은 김이예 가족은 생존한다는 것이 하나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꼭대기에 판잣집으로 지은 전시대학

우여곡절 끝에 공주농업중학교를 졸업한 하상춘에게 대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김이예는 하상춘에게 쌀 4가마를 주며 "이걸로 대학 가라"고 했다.

하상춘은 신흥대(경희대학교의 전신)를 가기로 결심하고 충북 청주에서 시험을 치렀다. 전쟁 중이어서 대학은 부산에 있었고, 시험은 청주에서 봤다. 우여곡절 끝에 신흥대 합격증을 받아든 하상춘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역에 내리니 산 정상까지 집이 들어선 모습이 마치 계단식 논에 벼가 가득 찬 모습이었다. 골목길을 한참 지나니 거의 산 정상에 판잣집이 있었다.

그 초라한 건물에 '신흥대학교'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쌀을 팔아 등록금을 낸 그의 주머니에는 돈 한 푼 남아 있지 않았다. 하숙집은 고사하고 자취방을 구할 돈도 없었다. 한숨만 내쉬며 판잣집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누구시오?"라고 물었다. 김병복 체육과 교수였다. 사정을 얘기하니, 김병복 교수가 조영식 교무처장 집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6개월 후 부산의 전시대학 시절을 마무리하고 서울 이문동 시대가 시작됐다.

세계에 이름 떨친 제자들

어느날 신흥대학에 재학 중이던 하상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학교가 망하게 생겼네." 충남 아산군 영인중학교 교장이 하상춘에게 자신의 학교에 교사로 올 것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다. 시골학교이다 보니 교사도 부임을 꺼리고, 부잣집 자제들이 입학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는 대학교에 적을 두고도 교사를 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월급 3천 원을 받기로 하고 영인중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에 부임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콘크리트로 역도를 만든 것이다. 자신이 공주농업중학교 시절 역도선수를 했기 때문이다. 6.25가 나던 1950년, 공주농업중학교 체육선생이 역도를 사 왔는데, 60kg을 자유자재로 들어 올리니 단번에 역도선수로 스카웃되었던 것이다.
 
역도선수 시절의 하상춘
 역도선수 시절의 하상춘
ⓒ 하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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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을 기반으로 영인중학교에서 역도부를 창설했다. 그가 영인중학교에 33년간 근무하면서 배출한 역도와 체육선수는 무척이나 많다. 전 한국체대 교수였던 안종철은 하상춘의 제자로,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하상춘은 제자들이 국제대회에서 이룬 쾌거를 잊을 수 없다.
 
"헝가리에서 열린 국제여자역도대회에서 최명숙이 은메달, 이미애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당시 올림픽 역도대회에 한국 여자 선수 5명이 출전했는데, 그중 2명이 우리 영인중학교  출신이었어요. 최명숙과 이미애가 모두 메달을 따, 그때의 기쁨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하상춘은 영인중학교에서 역도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100m 달리기, 투포환을 포함한 육상뿐만 아니라 10종 경기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 소년체전·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는 셀 수 없이 많다. 충남의 체육지도자도 그렇다.

그런 활동의 결과로 그는 1987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그의 집안 역시 체육인 가정이다. 전쟁의 아픔을 스포츠로 극복한 하상춘은 세상의 역경을 번쩍 들어 올린 진정한 금메달리스트다.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사진(2018년)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사진(2018년)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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