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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40 여명은 지난 30일 한국전쟁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추모제를 하고 있다.
 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40 여명은 지난 30일 한국전쟁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추모제를 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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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들이 산내 골령골 민간인 집단학살지와 동학 우금티 전적지를 찾아 역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40여 명은 지난 30일 한국전쟁 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 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현장을 둘러보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들은 동학혁명군들의 마지막 전적지로 알려진 공주 우금치 전적지(충청감영, 송장배미, 승주골, 이인면사무소, 우금티)를 차례로 둘러봤다.

이들은 특히 희생자 추모를 위해 제사상을 마련하고 축문을 낭독했다. 김흥수 시인은 축문을 통해 "그해 내내 골령골 하늘은 총성으로 흔들리고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다"라며 골령골 학살의 과정을 생생히 전달하고 했다.

1894년 우금치와 1950년 산내 골령골은 56년간의 시간적 거리가 있다. 하지만 정부와 외세에 의해 집단 희생을 당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공주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 운동 때 일어난 대전투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고개(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개혁을 요구하며 밀고 올라오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은 청나라 군사 파병을 빌미로 군대를 파병했다.

농민군은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이 연합해 우금치에서 조일 연합군과 맞섰지만, 무기 열세 등으로 패배했다. 일본군은 미국제 기관총을 난사해 사실상 맨몸으로 맞선 농민군을 대학살 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최소 4000여 명, 최대 7000여 명의 대량 학살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으로 민간인들은 북한군 남하 시 동조할 것을 우려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당시 미군은 학살 현장을 참관해 학살을 지원 또는 묵인, 방조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아래는 이날 동학실천시민행동 주관 약식 추모제에서 낭독한 김흥수 작가의 <골령골 씻김굿> 제목의 제문 전문이다.
 
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40 여명은 지난 30일 한국전쟁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추모제를 하고 있다.
 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40 여명은 지난 30일 한국전쟁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추모제를 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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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惟歲次)!
때는 바야흐로 1950년, 경인년 호랑이해였어. 왜놈들 물러간 해방 뒤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맨날 서로 못 잡아먹어 그렇게 안달복달을 하더니만 결국은 3.8선이 무너져 6.25 인공난리가 났소.

이른바 남북전쟁, 즉 한국전쟁이 시작이었지. '전쟁 나면 즉각 처 올라가 개성 가서 점심 먹고 저녁은 평양 가서 먹자'고 그렇게 큰소릴 치던 리승만 박사가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기고 남몰래 한강다리를 건너 여기 대전으로 피난 온 후 리 박사는 뒤통수가 몹시 간지러워지고 뒤가 몹시 급해 가는 곳마다 적극적으로 한데 짜고 뭉쳐서 오히려 달려들까 봐 미리 요시찰을 강화하고 좌익 불순분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바로 여기 골령골은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가 되었다네.

- 제발 그만 혀. 나 무서워. 이러다 다 죽어!
오징어게임 아니, 헌병대와 미군의 합작으로 이 살인 게임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대요, 글쎄.
전국에서 예비검속으로다가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으로 또 그렇게 대전형무소서 감방 살던 이들이 한 해 동안 대여섯 차례에 걸쳐 6000여 명이나 죽여 여기 묻혔대요, 글쎄.

좁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5열 종대로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한 상태에서 이마를 땅바닥까지 숙이게 한 다음 드르륵 빠방빵 총을 갈겼대요, 글쎄.

그 길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로 갔대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하네요. 영문도 모르고 여기 골령골로 끌려와 수많은 사람이 죽은 뒤부터 사람들이 죽는 거를 '골로 간다'라구 했대요. 글쎄.

까닭은 글쎄. 왼쪽이라구 또 빨갱이라고 때론 손가락 총으로 지목당해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지금도 억울한 백성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들려와요.

- 지발 살려줘유. 난 왼쪽두 빨갱이두 아녀유. 보도연맹? 난 그런 거 몰라유. 옆집 사는 마을 이장이 가입허믄 고무신두 주고 비료두 준다 해서 도장 한 번 찍은 거빢에 무슨 죄가 있대유?

- 안녕하우꽈? 지들은 제주서 와씸. 겐디 이른바 4.3 빨갱이랍서. 울 하르방 뭐랜 햄신디 살다 보믄 심이 들어도 착하게 살다보믄 저승길가멍도 나 호구시픈 모냥으로 갈 수 있다구 했는디 난 왜 이 모냥 이꼴마씸.

- 거시기 말여. 지들은 여수· 순천이 고향이랑께. 쟈들을 어뜨케 해브까잉. 하나도 모름시로 무조건 제주도 한겨레 4.3빨갱이를 토벌하러 가라는 걸 안 가겠다고 여·순반란군이라구 하제. 마구 빨갱이 폭도라 하제. 이르케 몰려 죽은 게 넘 너무 억울하당께.

- 우짜노. 믄소리고? 우덜은 갱상도 머스마라예. 빨치산두 아니고 불순분자도 아니라예. 근디 먼 친척이 독립운동했다고 거기다 오죽카면 친일파 싸고도는 리 박사도 나쁜 놈이라 캤더니 10년 더 꼽징역을 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서 8년이나 징역 살다 즌쟁통에 뭐라카노 풀려나 좋다커니 하고 고향 가다 저기 대전역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카니.

- 나 안 죽었어요. 총 맞아 반신불수로 평생 고생하느니 차라리 나 좀 한 방 더 쏴서 아예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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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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