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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노태우씨에 대한 애도, 조문, 국가장은 결코 용납될 수도 정당화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도 반성, 사과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아들여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면 화해, 용서할 수 있고 그것이 피해자의 치유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노태우씨의 역사적 죄악을 잘 알면서도, 희귀병으로 10년 동안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은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 상태로 서서히 죽어간 그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아들인 노재헌씨가 대신해서 매년 광주를 찾아 유가족들에게 거듭 사과한 것이나 2600억 원의 추징금을 완납한 것은 전두환과 다르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이와 죽음 앞에서 인간적으로 너무 모질게 할 수는 없다는 심정도 있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도 그런 것들을 감안해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가거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지는 않지만, 장례는 국가장으로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모든 것을 감안해도 노태우 씨의 죽음에 대한 추모, 조문, 국가장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노태우씨마저 애도하러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마음이 아니라,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져내린 독재와 학살의 피해자들의 마음이다. 쿠데타, 광주 학살, 6공 폭압 통치와 그 피해자들에 대한 노태우씨 자신의 온전한 사과와 반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사 누스바움은 <분노와 용서>에서 찰스 그리스월드를 인용하면서 사죄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요건들을 제시한 바 있다.

'자기가 책임 있는 행위 주체임을 인정하고/ (자기 행위의 부당성을 인정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행위와 그 행위를 저지른 자신을 비판하며/ 피해를 야기하여 느끼는 후회를 피해자에게 표현하고/ 거듭나려는 온갖 노력을 말로는 물론 행동으로 보여주며/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이해하려고 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자신은 어떤 면에서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해명을 제공해야 한다.'

노태우씨의 경우에 이런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법적 처벌부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노태우씨 본인이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가 진정성 있게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그의 아들인 노재헌씨의 사과는 있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너무나 드문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인상적이고 의미 있었다.

하지만 사과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대리해서 사과하는 것도, 피해자를 대리해서 용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당사자가 식물인간 상태라서 한계가 있었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의식과 사고는 유지됐다고 하면서도, 분명한 사죄의 뜻을 전하지 않은 것은 설명이 안 된다.

특히 2011년에 출판한 회고록에서 노태우 씨가 자신의 역사적 범죄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부분들을 개정해서 재출판하는 최소한의 조치들(5.18 피해자들이 핵심으로 요구한 부분)도 취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유언은 더 실망스럽다. 이것은 조건절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흐리고 있다.

노재헌씨와 가족들의 태도도 이해가 안 간다. 그동안의 사과가 진정성이 있었다면 가족이 먼저 나서서 국가장을 사양했어야 옳다. 그러나 국가장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독재와 학살의 주역들을 장례의원으로 포함시켰고, 결국 전 총리 노재봉의 쿠데타 옹호 추도사라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것은 '아들의 사과는 노태우 사망 이후에 예우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닌가'하는 그동안 제기되던 의심을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학살자들은 시민들에게 사과한 적 없고, 우리 시민들 또한 사과받은 적 없다"는 5·18 관련 단체들의 성명이 전적으로 맞다. 이것은 노태우씨가 악마나 괴물이었고, 그를 끝없이 저주하는게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5.18의 피해자들이 아니라 학살자들에게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기괴하게 웃으며 입에서 피를 흘리는 괴물이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병상에 누워 서서히 죽어간 사람과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노인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평범한 악인'들이 특정한 상황과 구조 속에서 학살자와 독재자가 됐고, 심지어 지지를 얻어서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었고,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과 손잡고 3당합당으로 권력을 연장하기도 했다.

그 당이 아직도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주요 양당 중에 하나이고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 이 당의 대선 후보들은 대선토론에서 또 다른 독재자인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는 발언들을 하고 있다. 곽상도처럼 독재에 부역했고 간첩조작과 '유서대필' 조작 등을 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국회의원 자리에 있고 다른 악행들을 저지르고 있다.

독재와 학살을 돕던 족벌언론들은 여전히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과 의제 설정력을 과시하고 있고, 이번에도 노태우씨의 서거를 추모하며 그의 업적을 강조하며, 화해와 용서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음으로써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 가해자들의 온전한 반성과 사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세력과 구조의 철저한 청산이 없는 어설픈 화해와 용서는 있을 수도 없고, 위험한 것이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태그:#노태우, #국가장 , #학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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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보다 사람이 목적이 되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함께 배우고 토론하고 행동하길 원하며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실행위원입니다. 더 많은 글들은 여기서 봐 주세요. http://anotherworld.kr/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74673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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