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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능력주의의 배신적 결말을 상상하는 이들도 다시 도돌이표처럼 능력주의식 처방으로 회귀한다는 지점에 있다.
 문제는 능력주의의 배신적 결말을 상상하는 이들도 다시 도돌이표처럼 능력주의식 처방으로 회귀한다는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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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설거지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설거지 서사는 외모적으로 매력적이지 못한 남성이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나름의 상상이다. 요약하자면 흔한 남성은 외모로 인해 낭만적 사랑은 불가능하며, 각고의 노력을 통해 '능력남'이 되더라도 결국 순수한 사랑은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은 단지 경제적 기생형태의 '사랑 없는 계약 결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설거지 서사의 비극성은 결국 '흔한 남성이 노력을 통해 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 한계치'를 그 위치의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정의한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설거지 서사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여성은 젊어서 매력적인 남성에게 쾌락을 얻고, 삶의 안정이 필요할 때는 '연애 경험 없는 능력남'을 찾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인다. 

반면, 그 반대편에는 미래의 아내가 될 사람이 잘생긴 남자와 순수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골방에서 지위 상승을 위해 노력하는 흔한 남성의 대비된 모습이 그려진다. 노력을 통해 능력을 획득하여 흔남에게는 높기만 했던 사랑의 장벽을 넘더라도, 결국 잘생긴 남자에게 순정을 줘버린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삶뿐이라는 것이다.

'설거지'라는 행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의미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다. 즉, 바깥에서 고생해서 돈을 벌어와 아내를 먹여 살리더라도, 부부 사이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휘둘리며 애써 가정적인 척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여성혐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매력적인 남자와 진한 사랑을 나눈 아내의 과거를 자신의 결혼이 씻어주는 용도로 쓰이는 데 불과하다 말하는 혐오적 표현이다. 이를 통해 설거지론에는 지위 상승을 통해 결혼에 성공한 흔남 출신 유부남도 결국은 지갑 없으면 사랑이 불가능한 '호구남'으로 귀결된다는 20대 남성들의 피해자적 서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와 배신의 서사

설거지 서사는 '능력을 키워야 예쁜 배우자를 얻는다'라는 기존의 능력주의적 연애 명제에 '새드엔딩'을 추가한 것에서 그 독특성이 발생한다. 확실히 자기 삶에는 낭만이 찾아올 리 없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능력주의가 자그마한 위안의 출구를 열어줬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입시와 취업을 비롯해 인생의 단계마다 사랑을 사회경제적 지위와 교환관계로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를두고 '공부 라이팅(가스라이팅과 공부의 합성어)'라고 부르며, 설거지 서사가 능력주의 연애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거지 서사가 갖는 특징은 '배신'이라는 결과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노력과 능력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던 청년세대가 결국 '수저론'으로 회귀하며 좌절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마찬가지로 매력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스스로 무산계급이라고 인식하는 이들 사이에서 분노와 체념의 정서가 흐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만약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정말 우리 사회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해 본 경험이 없고, 그래서 사랑받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으며, 언젠가 사랑을 하고 있을 자신의 캐릭터는 오직 '호구남'으로 귀결된다는 서사가 강력한 힘을 받고 있다. 또 그것을 어쩌면 자기 인생에 닥칠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받아들이는 상처받은 사람이 꽤 모였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강력한 징후로 보인다.

문제는 능력주의의 배신적 결말을 상상하는 이들도 다시 도돌이표처럼 능력주의식 처방으로 회귀한다는 지점에 있다. 세간의 비웃음을 샀던 '픽업 아티스트(연애코치)'에게 연애를 배우던 남자들은 이 설거지 서사의 전조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학원이라도 가서 배우고 싶은 마음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들이 연애를 배우는 방식마저도 '학원'과 '과외'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도록 이 사회가 길들여왔다는 데 있다.

한국식 능력주의의 가장 잔인한 측면
 
설거지 서사는 '능력을 키워야 예쁜 배우자를 얻는다'라는 기존의 능력주의적 연애 명제에 '새드엔딩'을 추가한 것에서 그 독특성이 발생한다.
 설거지 서사는 "능력을 키워야 예쁜 배우자를 얻는다"라는 기존의 능력주의적 연애 명제에 "새드엔딩"을 추가한 것에서 그 독특성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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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논란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제는 불행마저 능력주의의 범주에서 작동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특성이 가장 혐오를 당하고 가장 불행한 것인지를 두고 인정투쟁을 벌이는 데서 한국식 능력주의의 가장 잔인한 측면을 본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와 가난하고 무능한 남자와 같이, 캐릭터화 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의 군상들을 설정해놓는 세상이다. 그 불행한 캐릭터들이 상황의 개선보다는 제 위치가 더 아래라며 자리싸움과 인정투쟁을 벌이는 것은 능력주의 세상이 낳은 너무나도 처참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가난하고 못생기고 못 배운 이들에게 어떠한 푸대접을 해왔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

타인의 사상이나 종교에 관해 함부로 말해선 안 되듯이, 세상에는 못생김이나 무능함, 그리고 빈곤함 따위가 삶과 일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걸림돌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인생에서 자기 증명을 해야 하는 시기에는 자존감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으며, 그 쪼그라든 자존감은 남을 쉽게 공격하는 데 쓰이곤 한다. 패배주의에 젖은 이들에게는 어떠한 위로도 다 기만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좋지 못한 사고방식을 오직 환경으로만 정당화할 수 없다. 배경은 배경일 뿐 그것이 원인으로 모이려면 개인의 선택이 꼭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좌절 속에서 온전한 모양의 사랑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있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성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추하다고 비웃기 전에, 현실의 많은 청년들이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인간혐오에 빠지지 않을 환경 개선에 최대한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청년들 또한 무엇보다 인간 관계에 대한 경험을 인터넷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습득하는 것을 조금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넷상에는 자극적이고 진실 유무가 불분명한 괴담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것에 지나치게 물들어 온전한 사고방식을 잠식당하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내 소중한 인연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더불어 많은 청년들이 현실에서 조금 더 온순하고 다정한 이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차근차근 다정하게 어른이 되는 최소의 매너와 차림새, 상대와 대화하는 예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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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근로자, 부업 작가 『연애 결핍 시대의 증언』과 『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를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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