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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수군경력은 1592년 가리포진 첨사를 시작으로 1598년 전사하기까지 7년의 경력이 전부다. 이 7년의 경력 동안 이순신이 얼마나 바다를 알았기에 혼자서 했을 것인가?

그 기반은 바로 청해진제국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선소에서 배를 만들고, 격군으로 배를 조종하고 물때와 뱃길을 알아 운항했기에 이순신의 능력이 최고조로 발휘돼 역사에 혁혁한 인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완도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완도는 금송, 봉산, 황장산(황장갓)으로 책정해 황진리에 황장소를 설치하고 입산을 금지해 소나무의 벌채를 엄금하는 한편, 산감에게 직결권을 부여하고 황장목의 벌채를 엄격하게 단속했다. 

황장목은 금강형 소나무로 가운데 심재 부분이 특별히 크게 발달하고 누런 색깔을 띠는 소나무인데 다른 곳에서는 주로 왕실의 관곽을 만드는 제궁용으로 사용했다. 특히 완도지방은 전선 및 세곡선, 조운선 등 국가에 필요한 선박 건조의 중책을 맡고 있어서 일반백성들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완도의 소나무를 베어내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장소 산감이 완도 상왕산 기슭 사정리 위쪽 안찬골을 순찰하는데 아름드리 황장목을 베어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나무꾼이 있었다. 그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나무꾼의 도끼로 목을 잘라 높이 효수했다고 한다. 그 무서운 산감의 이름이 '안찬동'이라 했는데 울던 아이도 "안찬동 온다!"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지금도 완도읍 사정리, 중리, 화개리에서는 안창골의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황장목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두려움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만큼 엄격하게 관리되었다는 증명일 것이다. 1557년 제34대 가리포첨사로 재직했던 이선원 첨사의 이야기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1555년 가리포왜변이 정걸 첨사에 의해 진압되고 난 이후 왜구들의 안택선에 대응하기 위해 판옥선을 고안하고 완도에서 직접 건조했던 당시 완도 가리포첨사가 정걸이다. 그러한 정걸의 판옥선을 지속적으로 건조해야 하는 중임을 맡아 완도의 황장목을 관리한 첨사가 이선원이다. 

황장목이란 수백년 수령의 참솔을 말하는데 나무속에 송진이 가득 배어 썩지 않는 나무다. 옛날 완도에는 이러한 황장목이 울창했기에 국가에서 완도 상왕산을 국유지로 봉하고 민간의 입산 및 벌채를 엄금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해남 송지에 고효자라고 불리던 사람의 어머니가 노병으로 별세했다. 가세가 극빈해 관을 짤 나무를 준비하지 못하고 비통과 걱정에 빠져 통곡하고 있는데 집에 기르던 큰 삽살개가 끙끙거리며 고효자의 바짓자락을 물고 끄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고효자는 개를 따라 나섰는데 남창 나루터까지 인도해 완도로 건너가자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갈 배가 없어서 방황 중에 이번에는 삽살개가 고효자 앞으로 다가서면서 등에 업히라는 시늉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업히어 완도로 건너왔었고 개는 다시 주인을 안내해 특상품의 관목재가 될 큰 황장목 곁에 머물렀다.

고효자는 그 황장목을 보고 욕심은 났으나 새로이 걱정이 생겼다. 나무를 벨 연장도 없고 벤다 한들 거목을 베기가 너무 힘겨운 일이며, 또 완도의 황장목은 국법으로 벌목을 엄금하고 있었다. 이를 아는 지라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고효자는 앞이 캄캄하며 설움만 복바쳐 통곡을 억제치 못하여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럴 즈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1557년 당시의 이선원 가리포첨사가 격무에 시달려 졸고 있는 중에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첨사는 사령을 뒤따르게 하고 곡성이 들리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거기는 곧 상왕산의 중턱이었다. 

낙락장송이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한 곳으로 큰 황장목 곁에 황소처럼 큰 늙은 호랑이 한 마리와 울고 있는 고효자를 발견한 것이다. 고효자의 사정을 듣고 달래며 "내일 우리가 관을 만들어 보내줄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지금 건너가 어머니 장사를 정성껏 모실 채비를 하시오" 하고 귀가시켰다. 첨사는 약속대로 그 황장목을 베어 관을 만들고 쌀과 제수품을 마련해 고효자 댁으로 조의사를 파송, 장례를 무사히 치루도록 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완도만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장목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됐는가를 말해준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 중에선 동학혁명의 시발점이 된 허사겸 의거를 들 수 있다. 국가의 전선과 조운선, 세곡선 등 국가에 필요한 황장목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배를 만들기 위한 공역(貢役)의 명분으로 완도 백성들에 대해 벌어진 착취와 핍박의 결과가 의거로 분출된 것이다. 1882년 제215대 가리포첨사 이상돈 재직시에 일어난 의거다.

당시 나이 27세인 허사겸은 완도 군외면 당인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가리포진첨사였던 이상돈은 완도 상왕산에 무성하던 황장목을 베어 국가의 배를 만든다는 핑계로 황장목을 위험한 바닷길에 통해 운반하도록 하고, 각종 값나가는 비자나무 등을 베어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등, 백성들을 강제노역을 시키면서 사익을 챙겼다. 이를  보고 1883년 최도일, 박의중, 최여집 등과 함께 거사를 감행하였다. 거사문의 내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다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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