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한 해 계획은 곡식을 가꾸고, 십 년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이며, 평생 계획은 사람을 기르는 것(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이라는 말이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처럼 한 국가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교육은 철저히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는 게 근대 이후부터 상식이다. 나라 장래 계획에 부합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교육(公敎育)이 그만큼 제자리를 굳건히 지켜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전근대 이전 우리 교육은 전적으로 종교(유교)에 의존하던 체제로, 지배계급이 세습·독점하는 차별적 재생산구조였다. 고려 말부터 뿌리 깊은 차별을 당연시하던 지배계급이 전유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다. 이는 대를 잇는 계급으로 굳어져, 동일 계급 내에서 그에 걸맞은 교육을 세습시키는 사회구성체를 형성해 왔다. 나아가 성리학 바탕의 조선 지배담론으로 굳어진다.
 
1914년 완공된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 목조건축으로 석조를 모방하여 지은 건축물.
▲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 1914년 완공된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 목조건축으로 석조를 모방하여 지은 건축물.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이런 지배담론은 과학과 기술, 공학과 실업의 발전을 근원적으로 막아서는 뿌리 깊은 장벽이었다. 국가발전을 담보하는 공학과 과학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나라는 이렇듯 공허한 지배담론에 가둬두고 쉬이 간과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국가가 아닌 북학파가 주도한 '실학'이 어렵사리 태동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공교육의 시작
 
1914년 지어져 전쟁 등에도 온전히 보전된 모습. 현재는 앞 도로변 굵은 나무에 가려 저런 모습을 볼 수 없음.
▲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 1914년 지어져 전쟁 등에도 온전히 보전된 모습. 현재는 앞 도로변 굵은 나무에 가려 저런 모습을 볼 수 없음.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학자처럼 도열 해 선 대학로 굵은 나무들이, 이곳이 책 향기 그득한 캠퍼스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학교였던 이곳에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이 자리한다. 마치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한 하얀색 외관의 2층 건물이다. 의양풍(擬洋風, 서양 건축양식을 모방)이란다. 의양풍이라니? 일본말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생소한 말을…. 목조로 지어진 건물은 백 년이란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여전히 사람을 품어 숨 쉬며 살고 있다.
   
대학로는 서울대학교에서 유래한다. 당시로서는 한적한 동숭동에 1924년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이 모체다. 이·공과대는 공릉동(현 서울과기대)에 있었다. 대학로 큰 길가 2층의 하얀색 건물이 있는 곳은 경성제대가 아닌 '공업전습소' 자리다.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학무아문을 설립한다. 아문은 학제를 소학교, 사범학교, 전문학교, 대학교로 구성하고, 이듬해 〈교육입국조서〉반포를 통해 근대적 학제의 기틀을 마련한다. 자주적 근대화의 미래를 담보할 인재 양성이 목표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추진된 광무개혁은 갑오·을미개혁보다 한참 후퇴하여, 시작부터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교육 분야에선 신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방안이 마련되어 1899년 '의학교, 중학교, 상공학교' 설립이 반포된다. 이 중 상공학교가 명동 2가에 설립된다. 이 학교가 다시 수송동 제용감(濟用監) 자리로 옮겨가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학교 운영은 온전하게 이뤄지지 못한다.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의 100년전 일제 강점기 때 모습. 현재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
▲ 1921년 모습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의 100년전 일제 강점기 때 모습. 현재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
ⓒ 서울역사박물관(부분편집)

관련사진보기

 
1904년에 이르러 일본에서 차관을 빌어다 가까스로 입학생을 선발한다. 조선어·한문강독·작문시험을 거쳐 만17∼25세 젊은이 80명(공과 50, 상과 30)이다. 교과에 농업을 추가해 학교는 예과 1년, 본과 3년의 4년제 '농상공학교'로 변신하여, 외국인 전문 교관을 초빙하는 등 열의 있게 출발한다. 공학과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해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나라 운명은 풍전등화였고,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한제국이 의도한 교육계획은 을사늑약으로 인해 급속히 일제에 흡수되어 버린다. 일제는 '우민화 바탕의 황국신민화와 단기 교육을 통한 식민본국의 지원인력(단순기능인) 양산'이란 교육목표를 세운다. 식민지 경영을 뒷받침할 하급 인재 양성이 주된 목표다.

일제에 장악 당한 교육

1900년 대한제국 학부에서 초빙한 관립고등학교(경기고) 외국인 교사였던, 시데하라 다이라(幣原 坦)라는 인물을 주목해 보자. 이자는 1904년 '한국정쟁지'라는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조선 선비 결사체(朋黨)와 각 당끼리의 논의(黨議)를 '분열적 붕당정치와 음험한 당쟁'이라 격하시킨 최초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자가 1905년 통감부 지시를 받아 입안한 〈한국교육개량안〉 기조는 '한국인의 황국신민(동화주의)화 및 우민화'로 집약된다. 동화주의 핵심은 일본어 교육이다. 소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가르치고, 초등교사 양성소인 사범학교에서 일본어 교수를 이수토록 하는 조치다.

차별을 통한 우민화는 학제 개편이 바탕이다. 하급 인재 양성이라는 우민화 목표를 구현하려는 시데하라의 계획은 '수업 연한 단축, 학제와 과정의 단순화, 고등교육 유보, 인문교육보다는 단순 기능교육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1906년 제정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1911년 〈조선교육령〉 공포 이전까지 식민지 교육의 근간이 된다.

보통학교령 학제는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꾸면서 시작된다. 본디 5∼6년제 소학교가 4년제 보통학교로 격하되었고, 이 외에 수업 일수, 학년·학기제와 교과과정 등을 일제 입맛에 맞게 바꿔버린다.

공업전습소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 모든 정책이 일제와 친일 세력에게 장악된다. 이때 광무(鑛務) 및 철도학교, 우무(郵務) 및 전무(電務)학당 등 신교육기관이 폐지되는 운명에 처한다. 농상공학교도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해 보지도 못하고, 1906년 세 분야로 쪼개지는 운명을 맞는다. 황국신민화와 우민화라는 교육개량안 원칙에 따른 조치들이다.
 
방송통신대 역사관 등으로 사용 중인 현재의 모습. 'ㄷ'자 평면에서 돌출된 양 날개 부분은 팔라초 양식임.
▲ 방송통신대 역사관 방송통신대 역사관 등으로 사용 중인 현재의 모습. "ㄷ"자 평면에서 돌출된 양 날개 부분은 팔라초 양식임.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상과는 선린상업학교, 농과는 수원농림학교로 각각 이전·통합된다. 공과는 동숭동에 자리한 전환국 산하 기계시험소로 이전, 2년 6학기의'공업전습소(목공(건축), 도기, 염직, 토목, 금공, 응용화학)'가 된다. 4년제가 단기 2년제로 전락한 것이다.

통감부 주도로 1906년 〈관립공업전습소관제〉가 발표되고 1907년 60명의 신입생을 선발한다. 1907년 동숭동에 여러 교사(校舍)가 지어진다. 16830㎡ 부지에 실습실 7동과 부속관사, 기숙사 등이 단 6개월 만에 들어선다.

전습소 본관은 1907년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탁지부 설계로 공사에 들어가 1908년 2층 건물로 완공된다. 하지만 이 건물은 무슨 이유에선지, 또 언제인지도 모르게 헐려 사라지고 만다.
서광전이 지은 조선명승실기에 소개된 내용. 명치45년(1912년)에 착공하였음을 밝히고 있음. 아울러 공업전습소 본관 겸용으로 사용됨을 설명함.
▲ 조선명승실기에 실린 중앙시험소 서광전이 지은 조선명승실기에 소개된 내용. 명치45년(1912년)에 착공하였음을 밝히고 있음. 아울러 공업전습소 본관 겸용으로 사용됨을 설명함.
ⓒ gongu.copyright.or.kr

관련사진보기

 
일제는 1910년 농상공부령 제50호에 〈공업에 관한 시험〉을 추가시켜 연구·분석이 가능한 기술교육을 병행한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필요한 자료 등을 축적할 목적이었다. 이에 공업전습소는 1912년에 탄생한 총독부 산하 '중앙시험소'에 복속된다.
 
중앙시험소 본관을 지을 당시 부지 공사평면도. 가운데 서향의 'ㄷ'자 평면도가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으로 지어진 건물임.
▲ 중앙시험소 공사평면도 중앙시험소 본관을 지을 당시 부지 공사평면도. 가운데 서향의 "ㄷ"자 평면도가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으로 지어진 건물임.
ⓒ 국가기록원보도자료

관련사진보기

 
이때 1908년 처음 자리에서 20m 떨어진 곳에, 1914년 중앙시험소 및 공업전습소 본관 건물이 지어진다. 목조의 이 건물이 지금 방송통신대 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지붕은 기와 이음, 벽은 나무비늘판이음으로 마감하여 마치 석조건물처럼 보인다.

네오 매너리즘(습관적 반복, 상투적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창조력이 상실된 양식)의 건물은 수평과 수직이 대비를 이루며, 나무라는 재료로 인해 서구 매너리즘 건축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현관부 상부에 탑을 두고, 탑 위에 돔을 얹었다. 'ㄷ'자 평면 좌우 돌출부는 르네상스 팔라초(Palazzo, 정청이나 궁궐) 양식이다.
 
나무비늘판 이음으로 정교하게 마감한 외관이 마치 돌로 지은 건물을 연상시킴.
▲ 중앙현관부 나무비늘판 이음으로 정교하게 마감한 외관이 마치 돌로 지은 건물을 연상시킴.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공업전습소에 1910년부터 실습 위주의 단기 1년 과정인 실과가 별도로 개설된다. 전습소는 이후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1년 과정 실과는 경성공업학교(1922), 경성공립공업학교(1940)를 거쳐 지금의 서울공업고등학교가 되었다.
 
2년제 전문과정과 1년제 실과과정을 두어, 식민 본국을 뒷받침 할 하급기술자를 양성하던 경성고등공업학교의 1921년 모습.
▲ 경성고등공업학교(1921) 2년제 전문과정과 1년제 실과과정을 두어, 식민 본국을 뒷받침 할 하급기술자를 양성하던 경성고등공업학교의 1921년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2년제 전문기능은 경성고등공업학교(1916), 경성공업전문학교(1944)를 거쳐 해방 후 서울대 공대에 흡수된다. 입학경쟁률은 무척 치열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나마 한국 학생 입학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워진다. 한국 최초 건축가라 할 수 있는 박길룡과 시인 이상(김해경) 등이 이 학교 건축과 출신이다.

작금 우리 사회를 '민주화 이후'로 규정한다. 하지만 교육은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부(富)의 편중이 간격을 벌렸고, 벌어진 간격은 사교육 확대재생산 구조로 고착화되었다.

이 구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이제 계급으로 굳어졌다. 그 바람에 개천에서 나오던 용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간격을 메우고 징검다리를 놓아 이어주지 못한 제도 모순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도대체 지금 우리는 민주화 이후 세대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