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곁을 빙빙 돌던 막내가 "엄마, 저녁에 일해야 해요?"라고 물어왔다. 고개를 돌려 녀석의 똘망한 눈망울을 마주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녀석, 꺼내놓고 싶은 감정이 있구나.

요 며칠 녀석의 눈가가 자주 촉촉해 있길래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먼저 이야기를 제안해 오니 이 얼마나 반가운 마음인지. 경쾌한 물소리를 내며 "아니야, 엄마 저녁에 할 일 없어(요며칠 저녁마다 온라인 회의가 있었기에 녀석이 많이 기다려준 걸 안다). 엄마랑 뭐 같이 하고 싶어?" 물었다.

녀석은 이미 계획이 있었던지 구석에 잘 모셔둔 이미지카드(100장 세트)를 들고 왔다. 아하~! 우리아들이 엄마랑 깊은 대화가 하고 싶었구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진 열 살 아들이 거실 좌탁 위에 이미지 카드를 열심히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린다.

아이들의 깊은 속내가 궁금할 때 가끔 여러 카드를 이용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내가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이미지 카드 중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카드를 집어 들고 생생한 언어로 자신의 속내를 들려주었다.

주제별 질문카드 중 하나를 뽑아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면 자신도 미처 모르던 생각과 마음이 삐져나오는걸 경험하면서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다. 카드를 이용한 대화의 시간 후 아이들은 카드를 정리하며 한마디씩 소감을 내뱉곤 했다.

"역시 엄마는 고수야."
"엄마 앞에서는 이상하게 다 얘기하게 돼."
"엄마, 나중에 또 해요!"

자신의 10개월 무렵 영상을 본 막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곤 하는 이미지카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곤 하는 이미지카드
ⓒ 이설아

관련사진보기


속 깊은 대화의 희열을 맛본 막내가 오늘 저녁 이렇게 먼저 카드를 내미는 이유, 요 며칠 내내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자신답지 않은 우울모드를 내보인 이유를 난 안다.

얼마 전 우연히 컴퓨터 외장하드에서 발견한 위탁모의 품에서 웃고 있는 막내의 10개월 당시 영상을 아이에게 카톡으로 전송한 이후부터이다. 막내를 처음 보았던 9년 전 어느 날, 아이의 환한 미소에 반해 열심히 모습을 촬영했던 영상이 다른 자료를 찾다 갑자기 발견되어 기쁜 마음에 전송했었다.

아이는 영상 속 위탁모가 자신을 낳아준 엄마냐고 물었다. 아니야 이 분은 너를 열달간 돌봐주신 위탁어머니셔. 아... 고맙네. 위탁어머니. 어린 자신이 위탁모의 품에 안겨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낯설었나 보다. 영상 속에는 막내의 환심을 사고 싶어 말을 거는 내 목소리가 주변의 몇몇 목소리와 함께 들어있었다. "아, 엄마 목소리도 들린다." 막내는 집중하며 영상속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자신의 10개월 무렵이 담긴 영상을 시작으로 앞뒤 역사를 이어 정리하려니 갑자기 막내 안에 파도가 일렁였음은 당연지사. 위탁엄마 이전에 자신의 곁을 지켰을 낳아준 엄마, 위탁엄마를 이토록 좋아하던 자신이 다시 그 품을 다시 떠나 새롭게 만난 사람이 지금의 엄마와 가족이라는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별의 시점 이전을 담아낸 영상을 마주하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듯 가슴이 아파왔던 것 같다.

"아들, 그 영상을 보니까 어땠어?"
"내가 입양되었다는 게 생각 났어요."
"입양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어떤 마음이 들었어?"
"음... 뭐라 말할지 모르겠어요."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표현할 단어를 마리속으로 고르고 있는 아이를 엄마 품으로 오라해서 꼭 안아주었다. 길어진 몸은 엄마 품을 한참 벗어날 만큼 커버렸지만 마음은 이별을 앞둔 10개월의 아기로 돌아가 있을 아이를 아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이 그래서 요즘 눈가가 계속 촉촉했구나! 아기 때 영상을 보고, 위탁엄마 모습도 보니까 마음이 울렁거렸지?"

촉촉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엄마라도 그랬을 거 같아. 엄마도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마음이 이상할 때가 있거든, 너는 이 영상을 처음 봤으니 더 그랬겠다. 막내야 지금 네 마음을 잘 표현한 것 같은 사진 카드 하나 골라볼까?"

"내 삶은 참 좋았다"

여러 사진 위를 훑던 아이의 눈이 한장의 카드에서 멈췄다. 커다란 망원경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사진이다.

"우리 아들이 보고싶은 게 있구나! 어디 한 번 두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고 한 번 들어다볼까? 자, 뭐가 보이나요?"
"음... 내 과거가 보여요."
"오 그래? 거기엔 누가 있나요?"
"나를 낳아준 엄마가 있어요."
"아, 그렇구나! 우리 아들의 얼굴은 어떤 표정인가요?"
"엄마 얼굴을 봐서 싱글벙글 웃고 있어요."
"그렇구나, 아주 기분좋은가 보다."
"이번엔 또 뭐가 보이나요?"
"음.. 70대가 된 내가 보여요."
"오호? 할아버지가 된 우리 아들의 표정은 어떤가요?"
"미소짓고 있어요."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것 같아?"
"내 삶은... 참 좋았다."

손망원경을 내려놓은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고작 십여분 남짓된 손망원경 여행이었는데 아이는 며칠째 물이 차오르던 우물가를 벗어나 자신앞에 펼쳐진 초록 들판 위를 걷고 있었다.

"와,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랑 이야기하길 잘했어."
"그래? 엄마도 너랑 이야기하니 너무 좋았어."
"앞으로 울 일은 없을 거 같아."
"울 일이 생기면 울어도 돼. 엄마 봐, 아직도 자주 울잖아. 슬플 땐 울어도 되는 거야."
"그렇네. 헤헤."

이미지카드를 정리하는 아이를 뒤에서 보는데 5~6년쯤 큰 딸과 함께 통과하던 애도의 터널이 떠올랐다. 퇴근하면 침대 위에 곱게 놓여져 있던 큰 딸의 편지는 자신의 마음 속으로 엄마를 부르는 초대장이었다. 그 초대에 응해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아이가 세운 마음의 둑은 금세 허물지고, 눈물의 웅덩이들은 어느새 말라버렸다. 아이는 그렇게 나와 몇 년 마음을 합하더니 이젠 혼자서도 마음을 잘 돌보는 열 여섯 소녀가 되었다.

막내와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야무지고 단단한 이 녀석은 형, 누나보다 더 짧게 지나갈 것 같다.
사랑스럽고 기특한 막내야, 엄마가 힘껏 응원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가족의 연결을 돕는 실천가, 입양가족의 성장을 지지하는 언니, 세 아이의 엄마,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 저자, 가끔 예술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