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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15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대구 집회와 11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 유세. 노태우 후보는 돌이 날아올 것을 알고 미리 방탄유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1987년 11월 15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대구 집회와 11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 유세. 노태우 후보는 돌이 날아올 것을 알고 미리 방탄유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 MBC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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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자금에서 열세인 평민당은 후보를 앞세운 유세를 통해 정통민주화 세력을 자부하면서 선거전을 벌였다. 여의도공원 유세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평민당은 12월 13일 이번에는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대대적인 선거연설회를 열었다. 여기에도 150만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동아일보>보도)

선거전은 날이 갈수록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지역감정이 분출되고 민정당은 공무원ㆍ금융기관ㆍ기업체 종업원 등을 선거운동에 동원하고, 행정지원도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평민당의 자금루트는 철저히 차단되어 국민의 성금으로 겨우 유지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한국정당사에서 세 차례에 걸쳐 선거유세에서 가장 많은 청중을 모은 기록을 세웠다. 1971년 4월의 장충단유세와 1987년 여의도, 뒤이은 보라매공원의 인파가 그것이었다.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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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만에 실시된 직선제선거는 정당보다는 후보자별 대결로 특징지워졌고 이에따라 유세장마다 엄청난 인파가 동원 또는 참석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여의도 광장을 같은 유세지로 삼았는데 노태우 후보가 '130만이 훨씬 넘는' (12월 12일), 김대중 후보가 '130만 이상' (12월 29일), 김영삼 후보가 '130만에 가까운' (12월 5일) (이상 숫자추계ㆍ동아일보) 인파가 몰렸다.

특히 노후보 유세에는 수도권의 통반장을 비롯하여 금융기관, 기업체 종업원 등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고, 행정지원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민당은 김대중 후보의 서울 2차대회 (12월 13일)를 보라매공원에서 개최했으며 이 때는 150만 명이 모였다. (이하 수치 추계는 동아일보 참조). (주석 6)
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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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후보는 전국 주요 도시의 유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부산 수영만 유세에는 50만 명의 청중이 모이고, 대구에서도 수 만명이 참석했다. 부산 유세 때는 일부 청중의 소란이 일어나고 숙소에서 난동사건이 벌어졌다. 대구집회에서도 방해를 받았다. 이같은 사태는 다른 후보들도 비슷하게 겪었다. 김영삼 후보는 폭력사태로 광주연설을 중단하고, 노태우 후보도 계란세례를 받았다. 

김영삼의 광주 유세 때 그에게 돌멩이를 투척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보안사령부 H처장(준장)이었다. …H씨는 87년 대선 때 보안사 본부에서 김모 소령을 광주에 직접 내려보내 돌멩이 투척사건을 지휘하도록 했다. (주석 7)

노태우가 선거 4일 전에 여의도 유세에서 "88올림픽을 치르고 난 다음에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한 전격적인 제안도 보안사에서 만들어 준 방안이었다. (주석 8) 이처럼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에 투입되어 각종 공작과 정책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전국 각 지역의 유세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후보자들 가운데서 전국 어느 곳에서든 유세를 못한 일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에 대한 지지는 전국적으로 고른 것이다. 현지 지구당위원장의 준비 여하에 따라 청중 수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에 대한 강렬한 지지열기는 어느 곳에서든 높았다." (주석 9)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선거전은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1노 3김' 의 세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노태우측은 두 김씨 후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단일화되는 일이 없도록, 이른바 세력균형을 유지하도록 선거전략을 구사하면서 찬조연사들과 당홍보물을 통해 김영삼후보에겐 여자문제ㆍ능력문제 등을, 김대중 후보에겐 신의문제, 과격이미지 제고 등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안정이냐 혼란이냐" 를 내세워 야권 후보가 집권하면 정국이 혼란에 빠질 것처럼 각종 여론 매체를 동원하여 선전했다. 특히 김대중에 대해서는 어용언론과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용공 음해를 일삼았다. 김대중의 부산유세 때는 "좌경후보 김대중, 붉은 행동 열 가지" 라는 불온 유인물을 대량 살포하기도 했다.

투표 하루 전날에는 통일민주당에서 "김대중 후보 민주대연정에 참여할 듯" 이라는 내용의 당보 호외를 만들어 살포하려다 평민당원들에게 적발되어 압수되었다. 또 김대중 후보가 사퇴했다는 기자회견 내용을 담은 유인물이 전남북지방에 대량 살포되었다. 이것은 정보기관에서 양김을 이간시키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지난 1987년 12월 KAL858기 폭파 후 체포돼서 김포공항에서 압송되는 김현희. 자료사진 <연합뉴스>
▲ KAL기 폭파 당시의 김현희  지난 1987년 12월 KAL858기 폭파 후 체포돼서 김포공항에서 압송되는 김현희. 자료사진 <연합뉴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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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막바지에 KAL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11월 28일 밤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해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29일 오후 버마 근해인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공중폭발했다.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수사결과 테러범은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 아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공작원 김승일(70)과 김현희(26) 임이 밝혀졌으며 정부는 선거를 하루 앞두고 김현희를 한국으로 압송하였다. 김현희의 압송장면은 TV를 비롯하여 모든 신문ㆍ방송에서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투표 전야는 화제가 온통 KAL기 폭파범 김현희에게 쏠리고 관영, 어용매체들에 의해 공안분위기로 바뀌었다. 
 
사건발생 2년만에(90년) 찾았다는 KAL858기 잔해.
▲ 사건발생 2년만에(90년) 찾았다는 KAL858기 잔해. 사건발생 2년만에(90년) 찾았다는 KAL858기 잔해.
ⓒ KAL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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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노태우의 당선을 위해 투표 전날 폭파범을 전격적으로 압송하여 선거분위기를 바꿔버린 것이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그동안 군사독재 정권과 보수언론에 의해 용공음해가 덧칠되어 온 김대중 후보였다.

이런 가운데 김대중 후보는 인천집회에서 집권하면 7가지를 실현하겠다고 집약된 공약을 제시했다. △ 완전한 참여민주주의 △ 반공과 안보의 악용중지 △ 정치의 도덕적 혁신 △ 자유국민경제 △ 사회 각 분야의 자립 자주 △ 노동자 농민의 소득보장 △ 3단계 3원칙 통일방안 등이다.


주석
6> 앞의 책, <동아연감>, 56쪽.
7> <말>, 1993년 9월호, 103쪽, 재인용.
8> 앞의 책, 106쪽.
9> <동아일보>, 1987년 12월 7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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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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