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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으면 못 일어난다."

어릴 적 엄마에게 자주 듣던 말이었다. 근심 어린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밥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일어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정도. 말 그대로 밥을 안 먹으면 못 일어나는 줄 알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거르면 안 되는 절대적인 끼니였다. 나는 유난히도 저녁밥을 먹기 싫어했다.

어느 날, 심하게 아팠다. '내일 못 일어날 텐데'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아픈 데가 나았다는 것보다 '일어났다'는 게 신기하고 기뻤다. 엄마가 거짓말한 것은 아닐 테고 내가 행운아라고 믿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저녁을 거르게 되어도 두렵지 않았다(엄마의 밥상을 거부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엄마의 건강에 대한 집착은 나에게 더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바로 위 언니가 3살에 하늘나라로 가고 5년 후 내가 태어났으니 바람 불면 꺼질세라 노심초사하며 키웠으리라.

특별한 병은 없었지만 성장하면서 배앓이와 코피를 달고 살았다. 세수하다가도 코피를 쏟았다. 코를 문지르지 않고 씻는 바람에 비누질은커녕 물만 적셨다. 일명 고양이 세수. 좋다는 것도 꽤나 먹었다. 기억에 남는 단방약으로는 개구리 환과 익모초다. 모르면 될 것을 개구리로 만들었다는 말에 영 찝찝했다. 딸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었다. 엄마의 의지로 한 주먹씩 몇 달을 먹었을까. 코피가 멎었다.

모성애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마다 익모초를 빻아서 베주머니에 짠 즙을 내밀었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눈을 질끈 감고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켜고 나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공포스러운 쓴맛이 찬 기운과 함께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 졸리던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얼굴은 울상이 되었고 지켜보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쓴맛은 먹을수록 단련되는 일이 아니었다. 매번 용기와 다짐이 필요했다. 삼키기만 하면 결코 토하지 않는다는 말에 그나마 그 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마신 즙은 밤이슬을 맞은 거라고 했다. 소쿠리로 덮어서 장독 위에 하룻저녁을 두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독하리만큼 쓰디쓴 즙을 숙성시켜 위에 부담을 덜게 해주려는 지혜였을 게다.

안 먹겠다고 떼라도 쓸법한데 군소리 한번 안 하고 삼켰다. 튼튼해지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겠지만 엄마가 무서웠던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제라도.

쓴맛으로 다져진 혀는 어른이 되어 식성으로 자리 잡았다. 얼었던 땅과 나무에서 새싹이 움트는 봄. 쑥이며 머위, 두룹, 엄나무 순, 까중가리, 장녹 같은 나물이 좋았다. 쓴맛 뒤에 숨겨진 단맛과 고소함이 어우러진 나물은 특유의 향으로 입맛을 돋우고, 먹고 나면 속이 편했다. 제아무리 쓰다고 해도 익모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얘는 몸에 좋다면."

몸에 좋은 거라면 가리지 않고 먹어보는 내게 대명사처럼 붙어 다니는 말이다.

그 날은 산행을 하고 산장 평상에 앉아 산채나물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마르던 참에 평상 위에 놓인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약재 맛이 느껴졌지만 손님을 위해 끓여 놓았으려니 생각했다.

옆에서 보던 언니들은 약초 물은 안 먹는다며 머리를 흔드는데 주인이 와서 물병을 가져가며 말했다. "우리 남편이 마시는 물이에요."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산이 떠나갈 듯 웃었다. 세월이 흘러도 에피소드는 바래지 않는다. 기회가 될 때마다 웃음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얘는 몸에 좋다면 남의 남편 것도 먹어요."

밥 안 먹으면 못 일어난다던 엄마의 말은 자석처럼 따라다녔다. 소화기관이 약한 줄 알면서도 잘 먹어야 건강하다는 이유로 위장을 혹사시키곤 했다. 적게 먹으면 허전하고 영양이 모자랄 것만 같아 불안했다.

지금도 나의 건강염려증은 계속되고 있지만 먹기 위해 애쓰는 일은 줄었다. 소식하기, 몸이 안 좋을 땐 저녁 거르기, 간식 피하기 등이다. 이 실천사항을 엄마가 알게 된다면 기절할 일이겠지만 안 먹어서 못 일어나는 일은 없다.

'엄마, 요즘은 너무 먹어서 문제랍니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및 브런치 게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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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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