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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다방 커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진한 원두커피가 처음 등장한 20여 년 전, 호기심에 낯선 에스프레소를 입에 댄 사람들이 "이거 뭐야, 사약이네"라며 얼굴을 찌푸리는 광경을 자주 본 적이 있다. 사약처럼 검은 커피가 유럽 시민 사회에서 일상 음료로 등장하고, 노동자의 음료로까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였다. 산업혁명, 시민혁명, 독립혁명 등 여러 유형의 혁명으로 인류의 역사가 전환기를 맞은 격동의 세기였다.

18세기의 첫 해인 1701년 조선의 역사는 장희빈에게 검은 음료 사약이 내려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서양에서는 합스부르크가 출신 마지막 스페인 왕인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주변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이 해에 시작되었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제2차 백년전쟁이다. 조선은 붕당끼리의 쟁투로, 서양은 가문끼리의 다툼으로 시작한 것이 18세기 격동의 시대였다.

붕당정치를 막으려는 영조와 정조의 노력이 100년 동안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처럼 유럽에서의 전쟁도 세기를 넘겨 19세기 초까지 반복되었다. 전쟁의 명분도 다양했다.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구는 전쟁의 일상적 배경이었고, 심지어 옆 나라에서 여자가 왕위에 오른다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그런 사례다. 미국의 경우처럼 과도한 세금 부과에 대한 불만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카페 프로코프

18세기 서양 역사를 상징하는 단어에서 전쟁과 혁명만큼 중요한 것이 문화혁명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반 가톨릭적, 반 귀족적 문학의 발달, 그리고 왕실 중심의 장엄함에서 벗어나 화려함과 섬세함을 특징으로 등장한 새로운 예술 형식 로코코 양식의 등장을 합해서 일컫는 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몽테스키외(1689~1755)를 위시하여, 볼테르(1694~1778), 디드로(1713~1784), 루소(1712~1778) 등이 이런 변화를 견인하는 중심인물이었고, 이들이 즐겨 찾던 장소는 지난 세기말 1686년에 문을 연 카페 프로코프였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페 프로코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카페 프로코프
ⓒ Wikipedia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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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막이 오를 때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통치 하에 있었다. 루이 14세 시기는 프랑스의 명성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통치 후반기에는 힘을 잃어갔다. 통치 마지막 순간이었던 1713년과 1714년 사이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주변국들과 체결한 조약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루이 14세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극복하고, 화려한 궁정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민들의 모든 생활 영역에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대표적인 방식이 특허권을 팔거나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일이었다.

커피를 포함한 음료의 판매권을 특정한 사람이나 회사에 몰아주거나, 판매를 할 수 있는 권리인 특허권을 발급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을 반복하였다. 커피를 판매하는 사람들이나 커피를 소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한 이런 정책의 반복으로 왕실은 업자들로부터 작은 돈을 얻는 대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갔다.

1715년 루이 14세의 사망과 다섯 살 어린이 루이 15세의 등극은 프랑스를 이끌어온 부르봉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루이 15세는 커피를 궁중 음료로 만들 정도로 커피를 즐겼다. 베르사유 궁전 온실에서 재배한 커피나무로부터 매년 6파운드 정도씩의 커피체리를 수확하여, 직접 말리고 볶아서 끓여 마실 정도였다.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국왕이 손수 만든 커피를 제공하는 모습은 커피의 대중화를 촉발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파리에서의 카페 유행과 커피의 대중화 그리고 인도양과 카리브해 지역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커피 생산량의 증가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18세기 중엽에는 프랑스인들이 마시는 모든 커피는 프랑스의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커피로 충당할 정도가 되었다. 예멘으로부터의 커피 수입을 독점하고 있던 경쟁국 네덜란드 상인들이나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더는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부르봉 섬에서는 커피 생산량의 과다로 인해 재배 지역의 제한을 고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커피가 넘치다 보니 보다 맛있는 커피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볶은 커피를 물과 함께 끓이는 오래된 방식에서 벗어나, 커피 가루를 넣은 양말 모양의 천에 끓인 물을 부어서 추출하는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 18세기 초 프랑스인들이었다. 찌꺼기가 섞이지 않은 깨끗한 커피를 마시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 방식이 훗날 드립식과 퍼컬레이터(Percolator) 방식으로 발전하여 인류의 커피 문화 향상에 기여하였다.

시민 의식을 '깨운' 커피

신뢰를 잃었으나 회복에 힘쓰려 하지 않는 전제 군주의 무능, 그리고 반복되는 전쟁과 착취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반 시민들은 피곤하고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국민의 2퍼센트에 불과한 성직자와 귀족들은 면세 특권을 부여받아 화려한 생활을 지속하였지만, 85퍼센트에 달하는 농민들은 이들의 화려한 생활을 돕기 위해 과도한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나머지 계층인 봉건 영주와 관료 그리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자리와 부를 지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특히 루이 15세의 낭비적 궁정 생활로 재정난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선택한 증세와 국채 발행은 왕정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774년에 즉위한 루이 16세가 반전을 꾀하는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이조차도 기득권에 안주하고자 했던 귀족들과 고등법원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고등법원을 구성하고 있던 이른바 '법복귀족'들은 오직 엘리트 계층의 이익만을 대변하였을 뿐, 국왕의 개혁 시도도 시민들의 고통도 안중에 없었다. 이른바 앙시앵 레짐이라고 하는 구체제의 상징이었다. 법복 입은 자들의 저항은 당시나 지금이나 사회변화를 어렵게 함으로써 시민들의 고통을 지속시키는 걸림돌이었다.

고통 속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였던 시민들, 그리고 이런 시민들에게 희망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던 일부 계몽 지식인들 앞에 등장한 것이 커피였다. 권력을 쥐고 있던 통치자, 체제 유지를 지지하는 귀족들, 그리고 이런 구체제에 반대하는 계몽된 시민들의 눈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모두 달랐지만 그들의 코와 입을 지배하기 시작한 물질은 같았다. 바로 커피였다. 깨어나기 시작한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장소는 카페였고, 이들의 의식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한 음료가 바로 커피였다.
 
카페 프로코프에 모인 콩도르세, 라 하프, 볼테르(팔을 든 사람), 디드로(뒤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페 프로코프에 모인 콩도르세, 라 하프, 볼테르(팔을 든 사람), 디드로(뒤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Wikipedia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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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가 즉위한 직후인 1720년경 파리에는 프로코프를 비롯하여 380개의 카페가 있었다고 한다. 파리보다 카페 유행이 앞섰던 베네치아나 런던, 빈에 등장한 카페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반면, 파리에 등장한 카페는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출입하였다는 점에서 혁명으로 가는 길목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초기의 카페들은 영국의 커피하우스들이 그랬듯이 대체로 동질적인 사람들의 대화 공간이었던 반면, 18세기 중반의 파리 지역 카페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동질성을 파악하거나 만들어 가는 공간이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카페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카페들은 열린 공간이었다.

"커피는 많은 바보들이 일시적으로나마 현명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는 몽테스키외의 말에 끌리듯이 그동안 구체제에 복종하며 살던 바보들이 커피 향을 따라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 세대 전까지 프랑스 사람들의 여유 시간을 지배하였고 정신을 지배하였던 살롱과 와인은 점차 물러나고 그 자리를 정신을 맑게 해주는 새로운 음료인 커피가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이 맑아진 시민들에게 루이 16세가 휘두르는 징세의 칼이나 '법복 귀족'들의 권위는 두려움의 대상에서 증오와 저항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다.

바보에서 벗어나 시민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파리지앵들의 증오를 합리화해 주고, 그 저항에 불을 붙인 인물들은 계몽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이 마시는 음료는 커피였고, 이들이 모이는 장소는 카페였다. 비록 정치적 논쟁으로 늘 시끄럽고 귀찮은 곳이었지만 적지 않은 세금을 납부하는 것 또한 카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막으면 왕실 재정을 줄이는 달갑지 않은 결과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배자의 물질적 욕망과 피지배자들의 정신적 욕망이 타협한 채 프랑스의 카페들은 성업 중이었다. 18세기 후반에 파리 시내에는 800여 개의 카페가 이들의 욕망을 등에 업고 성업 중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파리 시내에는 2000개의 카페가 성업 중이었다고 주장한다.

1789년 7월 12일 일요일, 변호사 출신 언론인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이 "시민 여러분, 무기를 들라"라고 외치며 연설을 시작한 곳도 카페 푸아(Café Foi)였다. 푸아는 루이 13세와 14세가 한때 거주하였던 건물인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앞 정원에 있던 수많은 카페 중 하나였다.

데물랭의 연설에 감동한 카페 손님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을 시작함으로써 혁명이 시작되었다. 카페가 시민혁명의 기지였다. 이틀 후인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에게 정복되고, 시민들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는 민주주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커피를 좋아했던 대표적 인물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20세 그리고 베토벤이 19세 되던 해였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푸른역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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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 교수이며 커피인문학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2021), <한국교육 제4의 길을 찾다>(2019), <세계의 교과서 한국을 말하다>,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교육>(2015), <20세기 한국교육사>(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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