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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아이들을 입양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입양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 이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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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입양해줘서 고맙다는, 내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보면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는 편지를 자녀로부터 받고 감동적이라 펑펑 울었다는 어느 연예인의 고백을 듣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지난 15년간 우리 아이들에게서 백통도 넘는 편지를 받아보았지만 그런 내용이 우리 사이에 오간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가는 일이다.

입양과 관련된 이야기를 개방적으로 나누면서 자란 우리 아이들의 편지 안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고백과 엄마에 대한 감사의 노래, 형제의 만행(?)에 대한 고소고발이 있지만 자신을 입양해 주셔서 감사하고, 입양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니 감사하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그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면 어땠을지 단언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기특하고 감동적이라고 느끼진 않았을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성인입양인들과 교제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를 꼽자면 그들 마음속에 입양부모에 대한 '보은'의 개념이 굉장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라면 누구나 부모의 사랑과 수고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기 마련이지만 그 마음이 짠한 애정이나 감사로 표현될지언정 '보은'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그러나 입양인들은 '보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부모를 향한 마음에 '보은'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양부모인 내게 그 단어는 기특함과 감동이라기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으로 다가왔다. 부모와 자녀관계에 어째서 그 단어가 끼어들어야 할까? 우리 아이들도 그런 단어를 가슴 한켠에 품은 채 크고 있을까?

아이들 마음속에도 '지금의 부모님께 입양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얼른 잘 자라서 부모님께 은혜를 갚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시렸다. 입양인에게 있어 '보은'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여러 다른 욕구(뿌리찾기와 재회)를 기꺼이 통제할 만큼의 강력한 감정이란 걸 확인하는 순간 마음속 슬픔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염치없는 관계, 은혜 갚을 필요 없는 관계

나는 우리 아이들을 입양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낳은 내 새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닌, 입양된 내 아이들의 특별한 필요와 욕구를 잊지 않겠다는 엄마로서의 각오이다. 그러나 같은 마음선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이 입양됨을 매일 자각하거나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느낀다.

불쑥 입양과 관련된 이슈가 올라올 땐 직면해야겠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욕구와 내면에 충실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사랑과 감사만큼 원망과 불평도 같은 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함을 누렸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의 삶에 '보은'이라는 두 글자 대신 '가족'이라는 단어가 선명해지길 바란다.

2년 전쯤이던가. 세 녀석이 하도 속을 뒤집고, 엄마의 수고도 모른 채 지들 하고 싶은 것만 주장하길래 속풀이 겸 아버지와 통화 중에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날따라 속이 많이 상했던 나는 아버지께 위로라도 받으려는 심산에 아이들의 행실을 열심히 고발하며 이 녀석들이 얼마나 염치가 없는지를 전달했는데 내 이야기를 들으시던 아버지께서 단호하게 한마디 하셨다.

"염치 얘기하지 마라. 부모 자식 간에 염치를 자꾸 따지면 그건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닌기라."
 

염치없어도 되는 관계. 보은을 떠올릴 필요가 없는 관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는데 내 속 저 깊은 곳엔 아직도 그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구나를 느끼는 순간, 얼굴이 얼마나 벌게졌던지. 그치... 나도 우리 부모님께 참 염치없는 딸이었지. 48년을 그렇게 살아왔지. 염치를 따지는 관계는 가족이 아니라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날이었다.

보은에서 염치까지 생각이 길었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염치없이 요구하고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며 끝 간 데 없이 발악해도 안전한 그런 부모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만 건진다. 염치없는 관계, 은혜 갚을 필요 없는 관계, 그래야 진짜 가족 아닌가.

태그:#입양, #모두의입양, #입양아동, #입양가족,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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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연결을 돕는 실천가, 입양가족의 성장을 지지하는 언니, 세 아이의 엄마,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저자, 가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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