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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1일과 6일마다 서는 공주장에 나가봤다. 시장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떡집 앞을 지나는데, 총각무(알타리)를 산처럼 쌓아둔 근처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서성인다. 보기 드문 광경을 보고 그냥은 지나칠 수 없어 몇 마디 던져 봤다.

"알타리, 파시는 거예요?"
"아~뇨. 산 거예요."
"얼마에 사셨어요?"
"한 단에 5000원씩 하는 건데, 4000원씩만 달라대요. "


알타리 싣고 갈 짐차를 기다린다는 아주머니께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그곳은 영락없는 야채상이었다.

"얼마나 사신 거예요?"
"40단요."

"이 많은 걸 언제 다 담그시게요?"
"이게 뭘 많아요. 네 형제가 나눠 먹을 건데.... 오늘 저녁 절였다가 내일 아침 버무리면 금방 끝나요."


오가는 사람마다 아주머니네 알타리를 만지작거리며 얼마치냐? 초록 무가 맛있겄다! 말참견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이제 곧 들이닥칠 긴 추위에 대비할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목화는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비식량작물로 꼽힌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개량된 종자를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백제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 시기는 빠를 수도 있으나, 서민들의 의생활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익점의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 목화의 벌어진 열매 목화는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비식량작물로 꼽힌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개량된 종자를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백제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 시기는 빠를 수도 있으나, 서민들의 의생활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익점의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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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니, 잠옷과 내복류만 손수레에 싣고 좌판을 벌인 상인이 눈에 띄었다. 몇 해 전, 단돈 5000원에 면 100%인 잠옷 세트를 산 일이 있어 그때의 횡재수를 기대하며 다가가 봤다. 간절기에 입기 좋은 내복 세트를 쳐들고 가격을 물어보니, 5000원이란다. 보들보들한 게 감촉이 좋고, 가격도 합격점이다. 살까 말까를 놓고 재고 있는데 한 여인이 다가와 찜해 둔 내복을 만지작거린다.

"이거, 면 100% 맞죠?"
"여긴 애들 옷이 많잖아유. 죄다 면 100%유."
"제가 섬유 알레르기가 있어서 잘못 입으면 여기저기 가려워서요."


섬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손님은 설령 순면이 아니어도 5000원이면 후회할 일은 없다 싶은 내복 한 벌을 사서 휭하니 가 버렸다. 그 여인처럼 섬유 알레르기가 없다 해도 피부에 직접 닿는 의류를 고를 때면 보통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품질 표시가 없어 100% 면제품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나는 결국 내복을 사지 않고 돌아서고 말았다.

소통과 교류로 얻은 의생활과 식생활의 혁신

지금이야 피부 트러블을 염려해 섬유혼용률까지 따져 가며 옷을 골라 입지만, 고려 말~조선 초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베옷 한 장으로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2010년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의복이 발굴되어, 일찍부터 상류층에서는 인도에서 유입된 면직물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게 했다. 고려시대에 문익점이 청나라에서 목화 종자를 들여와 재배에 성공했다지만, 일반 백성들이 목화솜을 넣은 의복을 널리 입게 된 건 조선 왕조가 열리고도 한참 후로 보고 있다.

상류층에 속했던 문익점이 헐벗고 사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지 않았다면, 없이 사는 사람들은 후에도 얇은 옷 한 벌에 의지해 죽기 살기로 길고 긴 혹한기를 버텼을 게 뻔하다.
 
고구마는 뜻있는 선비들이 중국행 사신이나 역관을 통해 구해오고자 시도했지만, 반출이 엄하게 통제되어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영조 39년(1763), 통신정사로 일본에 갔다 1764년에 돌아온 '조엄'이 조공을 받던 대마도에 기항하여 종자를 들여오며 전국적으로 재배가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고구마 고구마는 뜻있는 선비들이 중국행 사신이나 역관을 통해 구해오고자 시도했지만, 반출이 엄하게 통제되어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영조 39년(1763), 통신정사로 일본에 갔다 1764년에 돌아온 "조엄"이 조공을 받던 대마도에 기항하여 종자를 들여오며 전국적으로 재배가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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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작물이 아닌 목화처럼, 다른 나라에서 유입되어 우리 민족의 일상을 확 바꿔 놓은 식용작물이 있으니, '고구마'가 그것이다. 

얼마 전, 한 학술세미나에 갔더니 기조강연자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 발발 시 일반 백성들이 왜(倭)에 당한 참혹상을 열거한다. 젖 먹이는 아이 엄마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어머니를 업고 가는 사내를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은 꺼내 던져 버리고 머리는 나무에 걸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보다 더한 사례가 기록에 많이 남아 있지만, 너무나 잔혹하여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채 1년을 넘기기도 전에 단절됐던 통신사를 일본에 다시 파견해야 했다. 일본에 새로 들어선 정권, 에도(江戸) 막부의 거듭된 요청과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 국익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중이 토박하여 생리가 가난하나 
효자토란 심어 두고 글로 구황(救荒)한다"고 하는데
쌀 서되 보내어서  사다가 쪄 먹이니
모양은 하수오요 그 맛은 극히 좋다.
마 같이 무르지만 달기는 더 낫다
이 씨를 얻어다가 아국에 심어 두고
가난한 백성들을 흉년에 먹게 하면
진실로 좋건마는 시절이 통한하여
가져가기 어려우니 취종을 어이하리.
-일동장유가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부터 11개월간의 통신사행에 삼방서기로 일본에 다녀온 김인겸은 쓰시마섬에 기항하여 고구마(효자토란)를 먹어보고 그의 한글기행가사<일동장유가>에 위와 같이 적고 있다. 이때 사행의 최고책임자격인 정사가 '조엄'이었다. 목화 같이 백성을 이롭게 할 것으로 여기고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조엄은 고구마 몇 말을 구해 부산진으로 보냈고, 1764년 3월 귀로에 오르면서도 고구마를 구해서 동래(東萊)에 전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장난질로 재배에 실패하지만, 사행에 올랐던 많은 이들이 제각기 가져와 실험 재배한 것이 성공하여 우여곡절 끝에 우리 땅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젠, 겨울 낭만에 취하다

배 주리며 살던 시절처럼 주식으로 먹지 않고, 고구마를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고구마 한 박스를 미리 사다 놔야 마음이 놓인다. 찌거나 구운 고구마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동치미와 궁합이 그만이다. 쪄서 얇게 저며 가을볕에 말렸다가 입 안 궁금할 때 간식으로 내어도 참으로 좋다. 

나이가 들면서 맹장군 만큼 무서운 게 없다. 그렇기에 봄, 여름, 가을엔 못 느끼다 겨울이면 '등 따숩고 배부를 때'의 행복감에 흠뻑 취하게 된다. 우리 곁에 와 준 이국의 목화와 고구마를 떠올리니, 겨울이 주는 낭만에 벌써 스르르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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