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관련 이미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관련 이미지. ⓒ 엣나인필름

 
"가족이 있는 조국에 나를 보내 달라." 지난 11년 '평양 시민' 김련희(52)씨가 헤아릴 수 없이 말하고 생각한 바람에 최근엔 하나가 더 추가됐다. "이제는 죽어서라도 가족 옆에 묻히길 바란다"는 생각이다.
 
김씨는 지난 3월 간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해 병세가 악화하기 전 치료를 받았다. 김씨는 그제야 자신이 한국에 오게 된 이유가 상기됐다. "맞아. 나 간이 아픈 환자였지. 간 때문에, 간이 아파서 치료받다가 돈 벌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북에 있는 어머니는 3년 전 시력을 잃었다. "돌아간다 해도 내 얼굴을 못 보신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부모님은 연로해가고, 자신은 한국 정부 억류에 발이 묶였다. 김씨는 "정말 내가 간암으로 죽으면 가족도 못 만나고 떠나고, 심지어 가족 옆에 묻히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두렵다.
 
"저는 제 가족에게로 돌아갑니다." 김씨는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를 끄지 않고 있다.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 타의로 한국에 들어온 후 11년 내리 북송을 요구 중인 김씨의 삶은 이승준 감독의 영화 <그림자꽃>에 담겼다. <오마이뉴스>는 <그림자꽃> 시사회가 열린 지난 25일 오후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 영화관에서 김씨를 만났다.
 
11년째 억류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
 
영화는 2015년 경북 영천의 한 플라스틱 재생공장에서 일하는 김씨 모습으로 시작한다.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 회합·통신 등) 혐의로 구속된 후 2015년 10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후다. 김씨의 기구한 사연이 <한겨레> 보도로 처음 알려진 때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후부터 지금까지 김씨 행보를 쭉 따라간다.
 
김씨의 입국은 처음부터 '사고'에 가까웠다. 단순히 '비밀로 입국해 몇 개월 치료비 등 돈을 벌고 나오자'는 생각이었다. 탈북 브로커에게 여권을 빼앗기거나, 한국 입국 후 출국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김씨는 "평양의 보통 아줌마였고, 북과 중국의 접경 지역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접경지역에선 밀수와 비공식적인 월경이 흔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2010년 간에 복수가 차는 증상으로 김책공업대학에 6개월 동안 입원했다. 이후 병이 조금 호전되자 2011년 5월 친척이 있는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무상의료제인 평양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를 겪었다. 중국에서 치료받으려니 비용이 상당했다. 친척 언니에게 손을 빌릴 수 없어 식당에서 서빙 일을 했다. 그러다가 식당에서 우연히 탈북 브로커를 만났다. 그는 '남한에 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여기서 이러느냐'고 말했다. '남한에서 여섯 달만 지내면 여권이 나온다'고도 했다. 김씨는 중국에 있으며 몰래 남한에 입국해 몇 개월 돈을 벌다 들어온 조선족 사례도 봤다. 브로커에게 여권을 주며 남한 입국 의사를 밝힌 경위다.
 
그러나 탈북 도중 남한에서 다시 북으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김씨는 브로커에게 탈북하지 않겠다며 여권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2011년 9월 자기 의사에 반해 남한에 입국했다. 이때까지도 '남한에 가면 같은 민족들이니 얘기하면 보내 주겠지'라고 믿었다.
 
탈북 거부 의사를 밝힌 때부터 지금까지 11년 동안 김씨는 모두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입국 직후 만난 국정원 수사관에게도, 경찰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속아서 입국하게 됐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다. 북으로 돌아가고 싶다. 제발 돌려보내 달라." 이를 들어준 정부·수사기관은 지금까지 한 군데도 없다.
 
이후 이어진 '간첩 사건'도 연장선에 있다. "간첩이 되면 죗값을 물은 다음 북으로 강제추방하겠지." 북으로 돌아가 가족을 보고 싶은 간절함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기존 한국 제도에선 어떤 방법도 찾지 못했고, 결국 2000만 원이 드는 위조 여권까지 알아봤으나 잘 풀리지 않은 때다. 심적 고통에 자살 기도도 여러 번 했다. 결국 김씨는 탈북민 17명 연락처 등을 휴대전화에다 저장해 스스로 경찰서에 '간첩'이라고 자수했다. 그가 2014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사를 받은 이유다.
 
"죽어도 몸이 북으로 갈 수조차 없어"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관련 이미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 꽃> 관련 이미지. ⓒ 엣나인필름

 
"여기서 (북으로) 보내 주면 자기네(남한) 정치가 나쁘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안 해. 죽어서도 갈 수가 없어. 죽는다고 몸이 갈 수가 없어." (한 탈북민이 김씨에게 한 말)
 
영화 <그림자꽃>은 이후 김씨의 자유가 국가보안법이란 임의의 제도로 인해 어떻게 박탈되고 억압받는지를 담담히 보인다. 김씨는 2015년 3년의 집행유예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지만 보호관찰의 속박에 시달렸다. 법무부 보호관찰관은 일주일에 1~2번씩 김씨의 업무 시간에 그를 불렀다. 매번 조퇴해야 하니 눈치가 보였다. '간첩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라는 점이 공장에 알려져 따돌림도 당했다.
 
"당신들이 오라고 문자 보내면, 회사 다니는 사람들 어떻게 다닙니까?", "매주 그렇게 오라고 하면 회사에 뭐라고 말해야 돼?", "회사에 말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했잖아?" 영화에 담긴 김씨의 분노 섞인 발언이다.
 
여권 발급에 신이 나 찾아간 동사무소에서 '출국 금지' 대상이라는 말을 들은 장면은 단적이다. 김씨는 입국 직후 7년간 여권 발급이 금지됐다. 국정원의 신원특이자 분류 때문이다. 2018년 8월 겨우 여권을 발급하게 된 김씨는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법무부의 '출국 금지 연장 통지서'를 꼬박꼬박 받았다. 언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 '6개월당 한 번 발송'으로 바뀌었다.
 
동포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린 강릉도 찾아갔다. 여자아이스하키 선수들을 보러 경기장을 들렀다. 그러나 수십 명의 사복경찰들과 국정원 수사관의 제지로 가까이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김씨는 "고향 사람 한 번만 만나자고요", "이 나쁜 놈들아", "이게 뭐라고 막느냐"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정치 모른다. 억만금 줘도 못 바꾸는 게 가족이란 건 안다"
 
 영화 <그림자 꽃> 출연자인 김련희씨.

영화 <그림자 꽃> 출연자인 김련희씨. ⓒ 엣나인필름

 
2020년 12월 대구지검은 김씨를 찬양·고무 및 잠입·탈출 혐의로 기소했다. 2016년 김씨가 사회주의권 국가인 주한베트남대사관을 찾아 인권보호요청서를 내며 '북으로 돌아가게 도와달라'고 한 행위에 국보법 위반 혐의를 씌웠다. 대사관의 퇴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며 공동퇴거불응죄도 적용했다. 그 외 검·경은 2015~2020년 동안 김씨 SNS와 메일 등을 뒤져 북한에 대한 찬양·고무 혐의를 적용할 글·영상도 수십 건 찾아냈다.
 
지난 3월 첫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열리지 않고 있다. 김씨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아 모른다"면서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7조 위헌법률 심판 사건을 심의 중인데 이에 부담을 느껴서 미루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국가보안법 7조는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고무를 금지한 조항이다. 현재 헌재엔 7조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심판 청구가 11건 접수돼 있다.
 
지난 2016년과 2017년, 전 대통령 박근혜씨 탄핵 요구 촛불집회가 연일 열리고 탄핵까지 됐던 때 김씨는 희망으로 부풀었다. 특히 '인권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에 기뻤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이었다는데 그분들은 소외된 사람들 짓밟히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켜주지 않느냐"며 "대통령이 되면 나 같은 사람 아픔을 누구보다 챙겨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 당선 후 지금까지 정부의 대응은 변한 게 없었다. 오히려 지난해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까지 됐다. 출국금지 연장 통보서는 6개월마다 꼬박꼬박 우편으로 배달되고 있다.
 
김씨는 문 대통령 당선 즈음 이승준 감독과 함께 금은방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말 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딸 금련이에게 줄 반지, 목걸이를 샀다. 김씨는 이 선물을 4년 동안 고이 간직하고 있다.
 
김씨는 얼굴에 바르는 영양크림을 살 때마다 "이게 남에서 사는 마지막 화장품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2021년 연말에 접어드는 지금도 "올해가 또 갔지만 내년엔 꼭 갈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대한민국 시민으로 남기 싫은 거죠'라는 기자 질문에 "어디든 상관없다"며 "연로한 부모, 살붙이 딸, 남편이 살아있어요. 뭐가(어디 국민인지) 더 필요합니까"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도 "남과 북 모두 내 삶의 반쪽이 됐다. 처음엔 남이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내가 살아가게끔 의지가 된 수많은 사람이 있다"며 "그러나 여기엔 내가 있을 이유가 없는 거다.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게 가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주의든, 정치든 관심 없다"며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 나 때문에 눈물 흘리는 부모님들이 있다. 나는 평양 아줌마고 평양 시민이다. 북쪽 사람이다. 11년간 남에 억류된 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림자꽃 평양시민 김련희 이승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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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기자입니다. 제보 young@ohmynews.com / 카카오톡 rockyrkd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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