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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도로 전주IC 부근에 이르면 '더 늦기 전에 지금, 전주'라는 광고판이 시선을 붙잡는다. KTX 용산역에 들어서도 같은 내용의 광고판은 다른 광고를 제치고 단연 돋보인다. 빨간 치마저고리를 입은 20대 초반 앳된 여성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당장 전주에 가자고 재촉한다. 볼 때마다 잘 만든 광고라고 공감했다.

대선 경선과 대장동 특혜의혹에 가려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더 늦기 전에'라는 이슈에 들어맞는 중요한 정책이 최근 발표됐다. 대통령 직속 2050탄소중립위원회는 18일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안'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보다 40% 줄이고 2050년 탄소제로를 달성한다는 내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40% 감축 목표는 탄소중립을 향한 한국의 강력한 의지와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보여주는 것. 탄소중립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홍남기 부총리 또한 "정부는 경제구조 저탄소화, 저탄소 생태계 조성, 공정한 전환 지원을 통해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일 계획이며, 이를 위해 내년 탄소중립 예산을 63% 증액한 12조 원으로 편성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27일 국무회의에서 이 같은 안을 확정한다. 이어 11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발표한 뒤 UN에 제출한다. 강도 높은 온실가스 감축 정책이 산업 전반에 가져올 충격파는 상당하다. 2030년까지 40% 감축 목표에 도달하려면 앞으로 매년 4.17%씩 줄여나가야 한다. 이는 영국과 미국 2.81%, EU국가 1.98%보다 높다.

당장 경제계는 비현실적이라며 부정적이다. 온실가스 감축 기술이 상용화되지 않은데다 기업 현실을 고려하지 않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며 시큰둥하다.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정유 업계는 한층 더하다. 석유화학업계는 정부 정책에 부응하려면 270조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철강협회도 109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기후 재앙이 현실화한 상황에서 탄소중립은 더는 외면할 수 없다. EU는 2023년부터 탄소세 도입을 예고한 상태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도 '탄소세 신설'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정부가 강도 높은 정책을 내놓고, 또 대선 후보들도 가세하는 건 국제적 흐름과 같이한다. 더는 기후재앙을 방관할 수 없다는 위기감과 함께 국제적인 책임도 자리하고 있다. 이상기후 때문에 지구는 중병을 앓은 지 오래다.

이상 고온과 가뭄, 잦은 산불은 일상화됐다. 가뭄과 산불로 호수와 숲이 사라지고 급격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또 홍수는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대규모 인명 피해와 이재민을 낳고 있다. 극지방 빙하와 동토도 녹아내려 해수면 상승과 새로운 바이러스 출현을 부채질하고 있다. 여기에 땅과 바다를 뒤덮은 1회용 플라스틱과 비닐은 생태계 교란 주범이다.

살면서 '더 늦기 전에'에 해야 할 일은 널려있지만 환경과 생태는 무엇보다 앞선다. <2050 지구멸망>이란 책은 지구 종말을 2050년으로 경고한다. 저자 주장대로라면 인류 멸망까지는 30여년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일상화된 기후재앙을 떠올리면 엄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흔하게 접했던 실개천은 사라졌고, 수많은 생물이 멸종됐다.

겨울철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 얼음을 지쳤던 기억도 희미하다. 이제 실개천에서 멱 감는 건 소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정부가 이제라도 강력한 탄소감축 정책을 제시한 건 다행이다. 탄소중립은 쉬운 길은 아니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인류 생존과 직결된 공통된 관심사이자 미래생명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구체적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의원은 "정부 목표에 부응하려면 석탄화력 비중을 현 41.9%에서 21.8~15%로 낮춰야 한다. 이 경우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제시한 것보다 석탄화력발전소 15~21기를 더 폐쇄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전체 설비용량 가운데 석탄과 LNG발전 부분은 60.4%에 달했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이 부분을 모두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최악의 경우 생산량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결국 탄소중립은 기업과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감내하느냐에 달려 있다.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에서 바츨라프 스밀 교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경제가 붕괴하거나 현재 능력을 넘어서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채택하는 것"이라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세계경제 붕괴는 또 다른 인류멸망을 의미하기에 지속가능한 성장을 통한 탄소중립에 답이 있다. 기업과 소비자 모두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라는 기관차에서 내릴 때다.

ESG(환경, 사회적 가치, 지배구조) 경영은 그 일환이다. 기업들은 환경을 우선하는 기업 활동은 장기적으로 기업경영에도 이익이 된다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들도 관성적인 소비를 멈춰야 한다. 1회용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 억제부터 탄소중립을 염두에 둔 소비습관을 통해 동참할 수 있다. 녹색당이 제3당 지위를 확고히 한 독일 국민들은 탄소배출이 많은 비행기 타는 걸 부끄러워한다. 우리 의식수준도 거기까지 도달할 때 비로소 국제사회와 함께 탄소중립에 다가갈 수 있다.

기후변화와 탄소중립은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시대정신)'다. 정치인들은 더 이상 이상기후가 몰고 올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친환경 에너지 정책 전환에 따른 불가피성과 전기요금 인상 등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을 솔직히 알리고 기후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런 후보가 있다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표를 던지고 싶다. '기후악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기후 선진국'으로 이끌 대통령 후보가 절실하다. 덧붙여 '더 늦기 전에 지금, 환경'을 재촉하는 청년세대를 만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 전 국회 부대변인


태그:#기후악당, #탄소중립, #기후변화, #시대정신, #더 늦기 전에 지금,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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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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