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7 07:32최종 업데이트 21.10.2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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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로 전두환은 국민과 반대 진영에 위압적 자세를 보이거나 도피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뻔뻔한 모습 등을 보였다. 잠깐 동안에 불과했지만, 그가 다소 색다른 태도를 보인 기간도 있었다. 김대중에게 꽤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한 1992년 대통령선거 때가 바로 그 시기다.

그해 대선은 5·18 진상규명을 향한 국민적 열기가 점차 고조되는 시기에 치러졌다. 전두환의 신변이 불리해지던 때에 치러졌던 것이다. 이때 전두환은 노태우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지지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김대중에게도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으려 했다. 잘못하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으므로 '생명보험'을 가입하려 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전두환의 '생명보험'

전두환은 김대중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상당히 노골적이어서 파문이 일어났을 정도다. 김영삼이 5월 19일 민자당 후보로 선출되고 김대중이 26일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뒤인 1992년 6월 7일, 전두환은 육사 출신 민주당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연희동 파문'으로 보도될 만한 의미 깊은 발언을 남겼다.

그달 20일자 <한겨레> 기사 '대선 앞둔 정가에 연희동 파문'은 "지난 7일 장준익·나병선·임복진 의원 등 민주당 안 육사 출신 3인과의 만찬 자리에서 그가 김대중 대표를 격찬"했다고 한 뒤 "최근 전씨나 그 측근들의 언행 및 감정에 따를 경우, 전씨는 김영삼 대표보다는 김대중 대표 쪽으로 미세하게나마 기운 듯한 인상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1992년 6월20일자 한겨레신문 ⓒ 한겨레

 
그때만 해도 여권과 군부에 영향력이 있었던 전두환 측이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김대중에 대한 호평을 흘린 것은 아니다. 위 기사는 "정치권에서 먼저 제의해오지 않는 한, 그가 먼저 정치적 접촉을 시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두환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며 "지난번 김영삼 대표가 그러했듯이 김대중 대표가 찾아온다 해도 환영하겠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자신들이 김대중에 대한 호평을 흘려놓고도 '우리가 먼저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며 반응을 기대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5월 27일 연희동 자택을 방문한 김영삼처럼 김대중도 적극적 의사표시를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위와 같은 내용을 언론에 내보냈던 것이다.


전두환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도 시그널을 보냈다. 그해 봄에 있었던 둘째아들 전재용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를 명분으로 전재용 부부뿐 아니라 장남 전재국 부부까지 동교동의 김대중 자택에 파견했다.

9월 4일자 <동아일보> 3면은 전두환의 며느리와 아들들이 약 40분간 동교동 자택에 머물렀으며, 김대중이 이들에게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정치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임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기대하는 '덕담'을 신혼부부를 통해 전달했던 것이다.

노태우의 '생명보험'

전두환뿐 아니라 노태우도 적극적이었다. 그 역시 김영삼뿐 아니라 김대중에게도 보험을 들어두려 했다. 현직 대통령인 그가 야당 후보에게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는 대선 자금을 제공해주겠다며 접근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을 폭로한 뒤 크게 논란이 됐던 것처럼, 현직 대통령이던 1992년 당시의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두 차례나 그 같은 제의를 했다.

1995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은 김대중 측근의 말을 인용해 "지난 대선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국민회의(1992년엔 민주당) 총재에게도 선거자금을 제공하겠다고 수차례 제의했던 것으로 26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위 신문 5면은 김대중 핵심 측근의 말을 인용해 그 두 번의 제의 중에 한 번은 김대중 본인에게 직접 표시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선 자금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다만, 대선 자금과 관계없는 위로금 명목의 20억 원은 받은 사실이 있다고 시인했다.

"선관위는 전체회의에서 정당과 후보자가 부담하는 선거비용 제한액을 지난 13대 때의 139억여 원보다 164% 증가한 367억여 원으로 결정했다"(<매일경제> 1992.11.16.)는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20억 원은 법정 대선 비용에 훨씬 못 미쳤다. 노태우 측은 20억보다 훨씬 많은 대선 자금을 제공하고 싶어 했으나, 김대중이 거절하는 바람에 위로금 명목의 돈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쳤다.

김대중에 대한 노태우의 신호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대선 전에 여당 당적을 버리는 사건으로도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노태우는 대선을 앞둔 1992년 9월 18일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을 선언한 뒤(9·18 선언) 10월 5일 당적을 이탈하고 18일 현승종을 총리로 지명함과 함께 중립내각을 맡기는 초유의 정치행보를 선보였다.

대선 이틀 전인 12월 16일에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초원 복국집에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남이가?"라며 관권선거를 획책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현승종 중립내각은 당초의 표방과 달리 선거 중립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김영삼 입장에서는 9·18 선언이 상당한 타격이 됐다. 그로 인해 대선 자금을 모으는 데도 애로를 겪었다.

대통령이 여당 당적을 버린 데다가 중립내각까지 출범시킨 뒤인 11월 6일, 유창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 '정치자금 불(不)모금'을 선언하는 일이 있었다. 전경련이 기업들로부터 선거자금을 모아 여당에 제공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영삼이 겪은 일을 12월 1일자 <동아일보> '재벌 총수, 어느 후보에 돈 대나'는 이렇게 보도했다.

"과거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집권 여당은 자산 규모와 매출액을 기준으로 재벌 그룹별로 정치자금을 할당하는 식으로 거두어 들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중립선언으로 이제 집권 여당의 대선 자금을 기업에 떠맡기는 형태의 반강제 징수 방식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은 재벌 기업들은 노 대통령의 중립선언 이후 정치권의 자금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역대 집권당 후보들과는 달리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요로에 SOS를 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10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오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5.18 학살 주범들의 위기감

노태우가 이렇게 제한적으로나마 김영삼에게 타격을 줌으로써 김대중에게 조금이나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준 것은, 그 역시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5·18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대선의 결과가 김영삼 42.0%, 김대중 33.8%, 정주영 16.3%로 나타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선거 전만 해도 민자당이 승리할지 여부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역시 전두환처럼 기본적으로 민자당을 응원하되 김대중에게도 생명보험을 들어놓는 이중 행보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가 그런 선택을 내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는 전두환의 발언이다. 육사 동기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위의 '대선 앞둔 정가에 연희동 파문' 기사는 전두환이 민주당 의원들과의 만찬 때 김대중을 격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청와대 쪽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보도한다.

전직인 전두환이 현직인 노태우의 의중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현직이 전직의 의중을 확인하느라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대중에 대한 전두환의 호감 표시가 노태우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처럼 1992년 대선은 5·18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서 위기감을 느끼게 된 전·노 두 학살 주범의 반응이 두드러지게 표출된 기회였다. 다른 시기에는 위압적이거나 도피하거나 뻔뻔한 모습을 보였던 전두환은 이때는 김대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구애하는 듯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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