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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하상춘. 하수홍의 아들이다.
 증언자 하상춘. 하수홍의 아들이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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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 동무! 협조할 것이 있습네다." "무슨 일이오?" "마을을 깨끗이 해주고 갈 테니 협조하시기 바랍네다." 인민군의 살기 어린 소리를 들은 하수홍(1902년생)은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글쎄, 나는 뭔 소린지 통 모르겠소." "반동분자 하민홍(가명)이 있는 곳을 대란 말이오." "사람 목숨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됩니다!" "..." 충남 아산군 영인면 신운리 인민위원장 하수홍을 노려보는 인민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그 인민군은 잠시 후 "내일 다시 올 테니 다시 생각해 보시오"라며 마을에서 민청(민주청년연맹), 여맹(여성동맹) 간부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1950년 9월 아산에 주둔했던 인민군 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하기 바빴다. 마지막으로 영인면에 남아있던 인민군 3명은 인민위원회(면사무소)에 있던 서류를 소각했다. 그리고는 신운리 인민위원장을 하던 하수홍 집을 찾았다. 그의 협조를 얻어 하민홍 형제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악질 지주를 처단하고 북행(北行)길에 오르자는 심산이었다.

지주를 살린 인민위원장

그런데 인민위원장 하수홍의 입장은 완강했다. 신운리 지주였던 하민홍은 평이 좋지 않았다. 인민군 입장에서는 그런 하민홍을 감싸고 도는 하수홍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총을 메고 나타난 인민군들은 살기가 등등했다. 하민홍 형제를 내놓지 않으면 하수홍이라도 죽이겠다는 기세였다.

"위원장 동무 생각해 보았소?" "제 입장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 당신이라도 가야겠소." 하수홍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하수홍을 끌고간 인민군 행렬은 신운리 여우고개로 향했다. 하수홍 가족들이 곡을 하며 쫓아갔지만 고개 정상 아래에서 멈춰서야 했다. 여우고개 정상에서 인민군은 하수홍을 소나무에 묶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인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합니다."

"탕탕탕!" 하수홍의 목이 꺾였다. 그렇게 인민군이 떠나고 하수홍의 가족과 일가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소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곡을 하는데, 꺾여졌던 하수홍의 목이 반듯이 되었다. "앗!" 그렇다. 여우고개에서 인민군들은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고 하수홍은 자신이 총 맞은 줄 알고 혼절했던 것이다. 1950년 9월 26일의 일이었다.

신운리에서만 27명 체포

얼마 후인 1950년 11월 초. 신운리 곳곳에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산 아래 언덕배기에서 살던 하옥희(당시 11세, 하수홍의 딸)는 정신이 혼미했다. 경찰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메아리쳐 되돌아와 귀가 왕왕 울렸기 때문이다.

저기 멀리 자신의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이가 옥희의 눈에 보였다. 다름 아닌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원으로 그의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인민군 주둔시기 부역자를 잡으러 다닌 것이다. 몽둥이를 보지 못한 하옥희의 어머니 김이예가 불청객을 반갑게 맞았다. 그 단원은 "하수홍이 어딨어?"라며 윽박질렀다. 자라목이 된 김이예는 "집에 없는데요"라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그는 몽둥이로 김이예를 내리쳤다. "살려주세요" 김이예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지만 몽둥이찜질은 멈추지 않았다. 

대한청년단원이 다른 집으로 옮겨갔을 때 김이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김이예의 몸은 멍이 들어 시퍼래졌고 옷은 피칠갑이 됐다. 왼손 뼈 전체가 으스러졌다. 어린 하옥희는 울음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날 신운리는 마을 전체가 초상집 같았다. 신운리에서만 부역 혐의로 24명이 영인지서에 연행되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군·경이 수복한 지 한 달이 지나자 마을에 공포가 찾아왔다. 영인지서 경찰들과 대한청년단이 부역자 체포에 나섰기 때문이다. 인공 시절 완장을 찼던 이들 대부분은 인민군 후퇴 시에 월북을 택했다. 하지만 신운리 인민위원장을 한 하수홍은 몸을 피하지 않았다. 하씨 종중에서 인민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해 감투를 썼고 인민군 주둔 시기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운리 농민위원장 김선득, 여맹위원장 조〇〇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하수홍을 포함한 이들은 붙잡혀 온양경찰서 특경대에 의해 온양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렇게 연행된 이는 27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태운 트럭운전자의 증언에 의하면 하수홍은 1950년 11월 5일 아산군 배방면에서 학살됐다고 한다.

살아난 지주는 '빨갱이 사냥'
 
아산 설화산에서 발굴된 유해(출처-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
 아산 설화산에서 발굴된 유해(출처-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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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전 작고한 하옥희(1940년생)의 생전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 하수홍은 면사무소 일을 보셨고, 우리 남매 재워 놓고, 사랑방에 가 글을 읽으셨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면 펌프물을 퍼주시고, 채소도 길러주는 등 자상하신 분이었다"고 한다.

가정에서의 하수홍의 모습은 차치하고라도, 인민군이 후퇴하던 상황에 하민홍 형제의 처형을 온몸으로 막아낸 것만으로도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또 인공 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우익학살 사건이 신운리에서 전혀 없었던 점에서도 그의 성정을 알 수 있다.

군경 수복 후 마을 청·장년들이 목숨을 잃은 데는 신운리 지주 하민홍(가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찰과 대한청년단이 신운리 부역혐의자를 체포할 때 하민홍에게 의견을 구했고, 그는 손가락 총질을 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죽고 살고가 결정된 것이다. 하수홍에 의해 자신을 포함한 형제들이 목숨을 부지했는데도 그는 부역혐의자 처단에 가담했다.

하수홍과 함께 온양경찰서에 끌려간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영인면 신운리 농민위원장 김선득과 여맹위원장 조〇〇은 연행된 지 한 달 만에 무죄로 석방됐다. 그런데 그들이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때, 마을 지주집 자제들은 지게작대기로 그들을 흠씬 두드려 팼다. 이후 그들은 지서로 넘겨졌고 영인면 아산리에 있던 영인경방단 사무실에 구금됐다가 1950년 12월 초 아산리 소재 아산교회 교통호에서 처형됐다. (아산시, 『아산 민간인학살 전수조사 보고서』) 온양경찰서에서 무죄로 판명 나 석방된 이들이 우익청년단과 영인지서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등 떠밀어 다리에서 떨어뜨려

빨갱이 사냥은 마을 청·장년이 타깃이었다. 부역혐의자 체포에 인근 면의 학생연맹이나 청년회가 별동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아산군 인주면 모원리 사는 이근태가 부역 혐의로 인주지서에 연행됐다. 특별한 혐의가 없던 그는 며칠 후 풀려났다.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영인면 청년들이 뒤를 따라왔다. 이근태가 뒤를 힐끗거리다가 미행하는 청년들을 발견하고는 "자네들 아까부터 왜 나를 따라오는가?"라고 물었다. "뭔 말이요. 형님. 얼릉 가던 길이나 가소"라며 청년들은 빈정댔다. 청년들은 영인면 신운리 출신이던 이근태의 눈에 익었다. 

갑자기 청년들은 "형님, 잠깐 우리랑 갑시다"라며 완력으로 이근태를 영인면 방향으로 앞세웠다. 그들이 영인면 월선리 다리를 지날 때였다. "악"하는 비명과 함께 이근태가 월선리 다리에서 떨어졌다. 청년들이 이근태의 등을 밀어 다리에서 떨어트린 것이다. 이근태의 얼굴은 자갈에 부딪혀 피로 얼룩졌고, 다리가 삐었는지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신음하는 이근태에게 그림자 여럿이 다가가 돌멩이로 내리쳤다. 이근태의 경우처럼 당시 아산군에서는 우익 청년단이 서로 지역(면)을 바꿔가면서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부역혐의자 집을 파괴했다.

모자가 끌려가 매타작  

하수홍이 연행된 다음 날 그의 아내 김이예도 끌려갔다. 그녀는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 맞고 집에 돌아왔다. 다음은 아들 하상춘(1931년생) 차례였다.

김이예가 풀려난 지 일주일 후 아들 하상춘이 영인지서 옆 창고에 구금됐다. 그곳은 대한청년단 사무실이었다. "너 어떤 짓 했어?"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엎드려 뻗쳐." 고문자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오십까지 쉬어. 네가 그때까지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라며 그는 몽둥이를 내리쳤다. "하나, 둘, 셋." 하상춘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살아서 나가겠다'고 결심한 그는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흔아홉, 쉰." 실상 맞은 이는 멀쩡한데, 때린 이가 녹초가 되었다. 꿋꿋이 50대를 맞기는 했지만 정작 집에 온 다음 하상춘은 기절하고 말았다. "아이구야, 우리 장남 죽겠구나"라며 어머니 김이예는 안달이 나 아들을 살리려 백방으로 애썼다. 그렇게 죽다 살아난 하상춘은 이후에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1950년 군경 수복 후 세번이나 죽을 뻔한 그는 매번 오뚜기같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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