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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다카요시, 기도 다카요시 옛집에서, 기자촬영
 기도 다카요시, 기도 다카요시 옛집에서, 기자촬영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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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1833~77)는 오꾸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함께 유신 3걸이라 부르는 인물이다.

페리호 내항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막부를 타도하면서, 실력행사를 하는 것은 쇼인의 제자들의 몫이 된다. 요시다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되는 손주쿠 제자들은 서양식 군사근대화를 추진해 가는 것과 조선침략을 한 묶음으로 하여 방향을 트는 데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도의 정치적인 역할에 주목하는 이유는 메이지 유신 후, 조슈번을 대표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쓰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자웅을 겨루며 정국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손주쿠에서는 선생과 숙생 간의 토론 중에 하나는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군사근대화를 이뤄내야 하고, 정한과 독도침탈이 필요하다고 구체적으로 거론하게 된다. 정한론과 독도침탈론이 등장한 배경에는 외국으로부터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주변국에 영향을 미치는 근대화로 무장된 국가라는 위상을 떨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무력으로 조선을 제압하여야 한다는 목표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 일본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하면서, 실현 가능한 목표로 둔 것이 울릉도와 독도침탈론이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를 앞에 두고 있는 조슈번으로부터 가까웠기에 구체적인 목표로 정해지게 된다.

1858년 요시다 쇼인은 기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 울릉도를 침탈하여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평화시에 울릉도를 침탈하면 자원획득이 될 것이고, 조선과 만주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전략적인 요충지가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이듬해 요시다는 막부에 의해 처형당하는데, 기도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유체를 받아 매장한다.
 
쇼카 손주쿠, 요시다 쇼인이 실제로 가르치던 교실 모습이다.
 쇼카 손주쿠, 요시다 쇼인이 실제로 가르치던 교실 모습이다.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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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의 영향을 받아 1860년 기도는 정한론을 배경으로 막부에 독도를 개척하자는 건의안(竹島開拓建言書草案)을 제출하는데, 여기서 독도(竹島)란 울릉도를 가르킨다. 울릉도는 조선의 국토였기 때문에 여기서 개척이란 침략을 뜻한다. 조선을 침략하려면 울릉도가 먼저여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독도를 염두에 두고 볼 때 현재까지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들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본 어부들이 표류한 적이 있고, 어업기지 역할을 한 적이 있던 섬이라서, 무엇보다 일본 방위를 위해서 이 곳들이 요충지라는 이유로 침탈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전략적 요충지인 울릉도와 독도... 이들에게 중요한 건 '일본의 안보'였다 

조선 조정은 공도정책을 철회하고, 1882년 울릉도개척령을 펼치면서, 1900년 전후로 울릉도에는 정주자가 1000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에 대응하여 메이지정부는 1883년 울릉도에 남아있던 일본인 240명에게 섬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때 조사로는 야마구찌현 출신자가 가장 많은 134명이었다. 하지만, 그 후 일본인들은 울릉도에 다시 들어와, 1900년 전후로 200명 이상이 된다.

조선이 울릉도에 공도정책을 실시한 것은, 도민이 의도하지 않게 왜구에 휩쓸리는데에 대한 방지책으로 취한 것이었다. 일본 어부들에게는 주인없는 섬으로 비춰졌고, 기도의 제안서에 울릉도는 삼림자원이 풍부하고 어업기지로 적합한 섬이라는 것이, 침략하여 획득하여 할 섬이라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기도에게 보낸 쇼인의 편지에도 나타났듯이 울릉도가 구미 등 외국에 의해 점령당한다면 일본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면서 침공하여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당시 조슈번에 중요한 이유는, 한반도가 다른 외국의 영향권에 들어간다면, 일본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고의 연장선에서 나타나는 패턴이다.

하여튼 기도가 울릉도를 침탈하여야 하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첫째, 조선과 하기로부터 울릉도까지는 거리가 거의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둘째, 1860년대 당시 자주 외국선이 출몰하고 있기 때문에 국방을 위해서도 이 섬을 식민통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울릉도가 다른 외국에 의해 점령된다면, 조슈번으로서는 바로 눈앞에 외국세력을 두게 되어 안전보장상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셋째, 이미 울릉도에는 일본인 대여섯 가구가 입주하고 있는데, 마침 조선이 공도정책을 펼치고 있어, 어업을 위해 선박이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서도 침탈하여 개척할 필요가 있다고 막부에 제안한다.

1863년에 양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조슈번은 시모노세끼 해협을 통항하려는 미국, 프랑스 군함에 대한 포격으로 시모노세끼 전쟁이 발발한다. 이듬해 영국과 네델란드가 가세한 4개국 연합함대에 의해 조슈번은 무력화(無力化)되고, 양이운동의 한계를 체감한다. 전쟁 수습을 위한 교섭비용은 막부에 떠넘기면서, 조슈번은 신식무기를 도입하는 등 군사근대화를 통한 무력증강을 꾀하게 된다. 이후 근대화를 추진한 사쓰마번과 동맹을 맺고,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게 된다.

전쟁 뒤 영국, 네델란드, 미국, 프랑스와의 화의교섭에 다카스기(高杉晋作)는 통역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참석하는데, 4개 연합국으로부터 전략적인 요충지로 시모노세끼 남단에 있는 히코섬(彦島)의 조차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받게 된다. 중국 상해에서 조차지라는 반식민상태를 목격한 다카스기는 조차지만은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인 일본의 독도 침탈  

조선 주변의 해역에도 비슷한 시기에 많은 이양선이 나타난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면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시기로 이어진다. 여러가지 사정을 헤아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인식한 막부는 기도의 제안을 기각하게 된다. 이러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침탈을 시도한 제안을 현재도 이어받으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아베 정부에서 초중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기재하는 것을 의무화시켰다는 것은, 이러한 독도침탈을 통한 일본의 조선침략이 현재도 진행중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에서 독도침탈론을 종식시키려면, 일본의 안전보장과 조선침략을 한묶음으로 하여 진행하려 했던 의도가 현대사에서 일본을 전범국과 패전으로 이어지게 하는 비극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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