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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일, 신앙을 이유로 현역병 입영을 거부했다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던 오아무개씨에 대해 대법원은 '형사처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종교적 신념, 즉 양심적 자유에 따른 병역거부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양심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되거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는 대법원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 첫 사례였다. 앞서 6월 28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고 있지 않는 기존의 병역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법조계의 달라진 판단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법정 내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전반에 있어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피고인이 병역거부를 결심하게끔 만든 '양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논쟁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지을 소모적인 검증들로 귀결된다. 그 검증들로부터 어떤 판결이 내려지든, 병역거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한결같이 차갑다.

'국민으로서의 당연하고 신성한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여겨진다. 특히, 이른바 '군필자'들은 청춘을 바쳤던 지난날의 군 복무가 가치부정 당하는 듯한 사태에 박탈감을 느끼고 분노하기도 한다. 이렇듯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은 여전히 봉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형국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혐오와 탄압, 그것은 한창 전쟁 중이던 과거의 일본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 국내에서는 천황과 국체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주의가 나날이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인물과 단체는 공권력과 대중으로부터 격렬하게 공격받았다. 특히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 중국과의 싸움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제국 일본은 그야말로 '정신마저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 총력전 체제로 돌입했다.

총력전 체제 아래서 국민들의 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전쟁의 결과에 직결되는 중요한 과제가 됐다. 전란의 시대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설 자리는 없었다(관련 기사: 잘 알려지지 않은 '오야코동'의 과거). 이러한 사상통제의 광풍 속에서, 일본의 국체사상을 지탱하던 국가신토 뿐 아니라 불교와 그리스도교 계열의 주요 교파들 역시 스스로의 교리를 비틀면서까지 앞다퉈 국가와 전쟁을 찬미했다. 국가와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듯 시대적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기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 '아카시 마사토(明石真人)'라는 청년이 입영 후 집총을 거부했던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카시 마사토는 일본 여호와의 증인 단체인 등대사(灯台社)를 이끌던 아카시 준조(明石順三)의 장남이었다. 아카시 준조는 등대사 설립 이래 '예수의 재림'을 논하며 천황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국가폭력과 전쟁에 반대해온 인물이었다. 
 
제국 일본의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출진하는 학도병들을 환송하는 일본국민들(1943년) 제국 일본의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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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마사토 역시 아버지의 신념을 그대로 이었다. 1939년 징병대상자가 돼 입대하게 된 마사토는, 총기수여식에서 집총거부를 선언했다. 그는 "저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고 분명히 밝히며 넘겨받았던 소총을 상관에게 돌려줬다고 한다.

천황이 일본 국민들의 '어버이'이던 시대. 그때는 자랑스러운 '황군'에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국민이 천황에 대한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시대가 그러했으니,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를 거부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사태로 받아들여졌다. 마사토의 집총거부 사건은 각 언론사를 통해 대서특필되어 전국적으로 보도됐다. 대중은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한편, 일본군부 내에서도 이 집총거부 사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양심이나 신념에 따라 징병을 기피한 예는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헤아려도 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부로서는 군의 사기와 앞으로의 원활한 징병 실시를 위해서라도 이 초유의 사태를 엄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9년 6월 1일, 군법회의는 아카시 마사토에게 불경죄와 군법위반을 이유로 3년의 금고형을 선고했다.

마사토와 같은 비국민을 배출해낸 여호와의 증인 세력 역시 뿌리뽑아야 할 불순세력으로 간주됐다. 같은 달 12일, 50명의 경찰들이 도쿄의 등대사 본부로 들이닥쳐 마사토의 아버지인 아카시 준조와 그 가족들 그리고 신자들을 연행했다. 이 시기에 체포된 등대사 관계자는 1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를 묻는 혹독한 취조가 진행됐다. 

1심 기소 22명 중 17명이 배교... 집총거부 당사자마저도
 
사진의 오른쪽 끝단에 아카시 준조가 위치해있다. 1939년, 아카시 준조의 장남 마사토가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등대사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 1927년에 촬영된 등대사 모임 사진의 오른쪽 끝단에 아카시 준조가 위치해있다. 1939년, 아카시 준조의 장남 마사토가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등대사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 고베국제그리스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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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1심에 기소된 22명 중 17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다. 심지어는, 앞선 군법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병역거부의 당사자, 마사토마저 전향을 발표했다.

1941년 전향고백서에서 '제국군대의 일원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죄 많은 일신을 천황 폐하를 위해 바쳐 국방을 위해 기쁘게 죽을 각오'를 밝힌 마사토는 이후 전차대로 들어가 일본이 패전하는 날까지 종군했다. 일본을 뒤흔든 병역거부자의 존재는 고뇌와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렇게 지워졌다. 

그러나 아버지 아카시 준조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42년 4월 9일, 법정에 선 아카시 준조가 텅 빈 방청석을 앞에 두고 발언한 내용은 지금도 법정기록으로 남아 있다.

"평안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무엇을 더 논하겠습니까"
 
아카시 준조는 옥중 생활동안 신토와 불교의 경전들을 접하고는 '궁극적인 진리가 성경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출옥 후 미국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 끝에 1947년에 교단으로부터 제명되었다.
▲ 1954년의 아카시 준조 아카시 준조는 옥중 생활동안 신토와 불교의 경전들을 접하고는 "궁극적인 진리가 성경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출옥 후 미국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 끝에 1947년에 교단으로부터 제명되었다.
ⓒ <병역을 거부한 일본인>,이와나미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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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이는) 저를 포함해 5명입니다. 1억(일본 전체 국민) 대 5명의 싸움입니다. 1억이 이길지 5명이 말하는 신의 말씀이 이길지, 그것은 가까운 장래에 입증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 평안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무엇을 더 논하겠습니까."

아카시 준조는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어김없이 징역이 선고됐다. 이때 형무소로 들어간 5명 중 2명이 옥사하고 말았는데, 그 중 한 명은 아카시 준조의 배우자였다. 가족과 주변 신자들이 겪었던 고난을 전부 지켜봤던 아카시 준조의 차남은 병역거부 소동 없이 조용히 육군 군속으로 출전했고 결국 남방 전선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아카시 준조는 일본 패전 이후인 1945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감옥에서 석방될 수 있었다.

한 청년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면서 벌어졌던 비극적 사태. 신성한 의무를 거부한 '국민'의 존재에 국가와 사회는 분노했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고자 했다. 아카시 마사토의 입영 및 집총 여부가 거대한 전쟁의 흐름 위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얄궂은 일이다.

'국민'과 '의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비국민'을 색출하고 배제함에 있어, 논리적 당위성은 처음부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체포, 고문, 처벌, 죽음에 이르는 이 폭력적 탄압의 굴레 앞에서,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비극은, 개인의 존재와 그 양심이 일본이라는 나라, 천황과 국체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믿음이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전향이냐 고난이냐의 선택지를 강요받는 현실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한편 유사시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의  '교육칙어'는 제국시대 일본 교육의 근간을 이루었다. 일본의 어린이들은 천황숭배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국가주의를 흡수했다.
▲ 천황 부부의 사진 앞에서 이루어진 "교육칙어" 봉독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한편 유사시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의 "교육칙어"는 제국시대 일본 교육의 근간을 이루었다. 일본의 어린이들은 천황숭배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국가주의를 흡수했다.
ⓒ tanken.com(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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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사회는 소위 '인권'의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다. 적어도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과거와 같은 무자비한 고문과 짜맞추기 재판은 자취를 감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1945년의 패전으로 일본군은 해산됐고 징병제도는 폐지됐으므로, 아카시 일가와 등대사의 비극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혐오와 탄압 그 자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강도와 유형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전히 많은 '비국민'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당한 채 '전향'이냐 '고난'이냐는 선택지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병역거부가 '양심적인지의 여부'를 판가르는 불안정한 기준 위에서 고난이라는 선택지 위에 '형벌'이 포함되는 일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마사토의 전향은 일본의 패전을 막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비국민'들이 스스로의 양심을 거슬러 총을 잡게 된들, 그들이 실질적으로 군 조직과 국가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요구되는 전향이 진정으로 국익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면서도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국가를 넘어 인간 그 자체의 존엄을 논하는 것, 그것을 가능케하는 타협점을 찾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 위에서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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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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