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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구속부상자회가 5·18 정신적 피해배상 청구소송 접수처를 안내하는 현수막을 게시했다.
 5·18 구속부상자회가 5·18 정신적 피해배상 청구소송 접수처를 안내하는 현수막을 게시했다.
ⓒ 김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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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5·18 민주화운동 관련 정신적 손해배상을 규정하지 않고 국가배상청구를 금지한 구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아래 5·18보상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에 따른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당시 헌재는 정부의 5·18 보상에는 정신적 고통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5·18 관련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해지자 오월 단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10월 16일, 5·18 유공자 정신적 손해배상 공론화 토론회를 진행한 오월 3단체는 조속히 5·18 정신적 손배소와 관련된 공론화를 진행하고, 소송 참여자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5·18 구속부상자회는 '5·18 정신적 피해배상 청구소송 접수처'를 설치하고 11월 26일까지 소송 참여자를 모집할 계획이다. 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까지 600여 명의 5·18 관련자가 소송 참여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5·18 트라우마' 문제는 광주의 오랜 화두였다. 항쟁 과정에서 입은 신체적 부상과 심리적 외상으로 일상의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5·18 이후 50여 명의 5·18 관련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5·18 관련 부상 등 후유증 사망자의 10%에 달하는 수치다.

10월 31일 '5·18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소송' 참여자인 5·18 유공자 이동민(가명)씨를 인터뷰했다. 그는 "오월 이후 일상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토로했다.

아래는 이동민씨와의 일문일답.

- 5·18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1980년 당시 전남대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계엄령이 확대되면 학교 정문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에 따라 1980년 5월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갔습니다. 학교 앞에 완전 무장한 공수부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자, 곤봉을 든 군인들이 달려왔습니다. 군인들에게 잡힌 학생들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분노해 5·18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항쟁 기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매일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계엄군이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감행한 21일 이후에는 시민군으로 활동했습니다. 25일 도청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할머니가 찾아와서 시골에서 아버지가 오셨다며 집에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걸어서 전남 화순으로 이동한 후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개학한 이후에야 광주로 돌아왔는데, 5월 27일 도청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 이후에도 5·18 관련 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 10월에 학교 선배로부터 '김대중 법정 최후진술서'라는 유인물을 받아서 배포했습니다. 제 유인물을 받았던 후배가 사복경찰의 불심검문 과정에서 체포되었고, 저도 연루자로 지목되어 10월 20일 광주서부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구속된 직후부터 심한 욕설과 폭행을 비롯한 강도 높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들었는데, 저는 당시 들었던 말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뺨과 머리를 수십 차례 맞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귀에 이상이 생겨 한동안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난청, 환청, 이명이 심해 일상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있습니다."

- 이후 재판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요? "5·18 구속자들이 수감되어 있던 상무대로 이첩되었습니다. 영창에 도착한 순간 곤봉을 양다리에 끼고 발로 차이는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영창 내에서는 철창살에 거꾸로 메달리기, 물구나무 서기 등의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비동염이 심해져서 이비인후과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만성이 되어서 숨쉬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날 이후 대인기피증, 가슴 떨림, 부정맥 등이 지속되어 일상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전화를 받지도, 걸지도 못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1981년 1월 중순에 기소유예를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5·18 유공자 이동민(가명)씨의 재판 기록을 기록한 문서
 5·18 유공자 이동민(가명)씨의 재판 기록을 기록한 문서
ⓒ 김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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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방된 직후의 삶은 어땠나요?
"출소 직후인 1981년 4월, 갑자기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강제징집되어 끌려갔습니다. 군대에서는 선임들로부터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따돌림과 구타에 시달렸습니다. 또 강릉 보안부대에 끌려가 특수 교육을 명분으로 지하실의 작은 방에 격리되어 한달 반 동안 생활했습니다. 이때 심한 두려움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두근거리는 증상을 겪었는데, 그후 살아오면서 작은 일에도 심한 가슴떨림을 겪어 왔습니다."

-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군제대 후 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자들과 생활하면서 근로조건 개선 및 최저생계비 보장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1987년에 위장취업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또 고문을 당했습니다. 광주교도소에 70일 동안 수감되었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고, 이후 사면복권을 받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제과점, 유기농 매장 등을 운영했습니다. 사업장을 최종 청산한 이후에는 건설노동, 일용직 현장 등을 전전했습니다. 불안정한 근로조건 탓에 휴업, 해고 등이 반복되어 월급을 못 받기도 했고, 휴대폰 정지, 도시가스 정지, 건강보험료 납부독촉과 압류 통지 등에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로 살지 못하고 가족들을 고생시켜 미안할 따름입니다. 지금은 조그만 회사에 10년째 다니고 있습니다."

- 그날 이후 트라우마에서 자유롭기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땅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죽는다거나, 비행기나 무장헬기가 떨어진다거나, 집이 무너지고 해일이 몰려온다거나, 썩은 물고기나 무장헬기가 떨어진다거나, 군인이나 경찰들이 작전을 하면서 대열을 이루고 쫓아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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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해 고민하며 광주의 오늘을 살아갑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를 운영하며, 이로 인해 2019년에 5·18 언론상을 수상한 것을 인생에 다시 없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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