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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전체적인 맥락에서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이 조선침탈에 얼마나 깊숙히 개입하고 있는지 살펴본 후, 다음 기사에서 구체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좁혀가도록 한다.

1875년 10월 메이지정부는 운요호 포격으로 조선을 개항시킨다는 뜻을 굳히면서, 이듬해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게 된다. 조슈번은 운요호를 1870년 영국으로부터 구입해, 이듬해 메이지정부에 헌납했다. 손주쿠에서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이 요청했던 군함 구입을 실제로 실현시킨 것이다. 함포외교로 미국에 당한 불평등을 그대로 조선에 이식시키는데, 조일수호조규에서 편무적인 영사재판권과 관세자주권의 상실에서 나타난다.

강화도조약에 일본 측 전권대사 구로다(黒田清隆)와 함께 부사로 건너온 이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다. 메이지 신정부는 조슈와 사쓰마가 주도하며 협력하지만, 서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 인적구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쓰마 출신이 전권대사이면 조슈 출신과 조합해 협상팀을 내놓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조슈번 출신으로 손주쿠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손주쿠 출신과 가깝게 지내면서 교류를 지속해왔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 유학을 할 수 있었고, 손주쿠 출신인 정치가 가쓰라 타로, 기도 다카요시와도 교감을 이어가면서 메이지 정부에 깊숙히 개입하면서, 조선 정책에 간여해 왔다.

강화도조약으로부터 28년 후, 일본이 러일전쟁 육해전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는 가운데, 1904년 12월 수상인 가쓰라 타로(桂太郎)는 손주쿠 선배인 이토 히로부미한테 서신을 보냈다. 한국통감으로 부임하기 전,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던 이토에게 보낸 서신에는, 러일전쟁의 목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확보한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빼앗기면서, 일본에서 러시아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을 보여주었다고 자평하면서, 전쟁의 출구전략으로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 임하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러시와와 전쟁을 일으킨 제일 큰 목적은 한국의 존립과 만주의 보전을 위해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극동평화를 이룰 수 있고, 일본의 안전보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국의 존립이란 한반도가 다른 어떤 나라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영향권하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만주의 보전이란 만주에서 다른 외국보다 일본의 이익이 우선돼야 한다는 방향성을 담고 있다.

다음 기사에서 소개할 예정인 야마가타(山県有朋)가 제시하는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과도 공통적인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야마가타가 제시하는 주권선이란 일본의 영토를 지킨다는 안전보장을 의미하고, 이익선이란 일본의 안전보장에 영향을 끼치는 주변지역에 대해 일본이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에 의해 조선이 외교주권을 빼앗기며 일본의 보호국이 될 때, 일본의 수상은 가쓰라 타로였다.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간에 맺은 조약이 가쓰라 태프트 조약(1905년 7월)인데,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약이다.

가쓰라는 육군출신으로 수상으로 취임하기 전에 제3, 4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했고, 태프트도 미국의 2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니 서로 비슷한 경험과 역할을 맡은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식민지로 들어가기 전에 필리핀과의 맞교환을 통해, 미국은 조선식민지화 과정에서 이익을 챙기면서 충실하게 조연역할을 했다.

가쓰라 타로는 2019년까지 아베 신조에 의해 추월당하기 전까지 8년 가까이 재임하였던 최장수 수상으로 기록된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존경하는 인물은 조슈번 출신인 요시다 쇼인이다. 가쓰라는 나가토(長門) 출신, 아베도 부친으로부터 야마구찌현의 지역구 야마구찌1구(이전 나가토)를 물려받았으니, 두사람이 활동한 시기는 1세기 이상 떨어져 있지만, 조슈번과 관련이 깊다.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함께 도꾸가와 막부를 무너뜨려, 메이지유신후 두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를 많이 배출하는 이유가 된다.

가쓰라 타로와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테면 서당 선후배인 셈인데, 훗날 대한정책을 두고 대립하게 된다. 군인 출신인 가쓰라는 처음부터 병합을 통한 조선식민지를 목표로 추진하는데 반해, 이토는 자치까지 염두에 두면서 식민지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토는 양원제를 도입하여, 양반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상원 50명을 두고, 하원에 8도 대표 각10명씩을 선출하는 의회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로부터 저격받기 전, 1909년 4월 이토는 조선병합으로 기울게 된다. 대신에 자치제는 일본의 식민정책에 협력하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구조에 반영된다.

요시다가 하기의 손주쿠에서 실제로 가르친 시기는 짧았지만, 일본정계에서 거물들을 배출시켰고, 특히 한반도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첨부파일
GBW 24 (21-10-18).d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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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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