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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과 바람에 은빛으로 출렁이는 억새밭
▲ 민둥산의 억새 가을 햇살과 바람에 은빛으로 출렁이는 억새밭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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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그리는 아이의 손은 자꾸만 밤색과 주황색 크레파스로 갔다. 산에 색을 입히려면 초록색을 집어야 하는데 아이가 기억하는 산은 황갈색이었다. 산이 별로 없던 지방 대도시에 사는 아이가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보던 산은 초록의 나무 대신 붉은색 황토로 뒤덮인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 대한민국 산의 모습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산림녹화사업 성공은 '나무가 없어 맨바닥의 흙이 드러나 민둥민둥하다'는 보통명사 민둥산이라는 단어를 강원도 정선 땅에 있는 민둥산이라는 고유명사로 만들었다. 이젠 검색창에 '민둥산'을 치면 억새 군락지로 유명한 정선의 민둥산만이 나온다. 아마도 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민둥산이란 보통명사를 아예 모를지도 모르겠다.

해발 1119m인 민둥산은 8부 능선을 지나면서 숲은 사라지고 억새군락이 시작된다. 억새 사이로 조성된 계단 길을 오르니 하늘이 훤히 뚫리면서 멀리 정상이 한눈에 보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0만 평의 억새밭 한가운데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그윽한 억새밭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0만 평의 억새밭. 골짜기 사이의 임도와 밭구덕마을이 보인다.
▲ 민둥산 정상의 조망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0만 평의 억새밭. 골짜기 사이의 임도와 밭구덕마을이 보인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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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은 산 정상이 평평하고 큰 바위가 없어 예부터 화전민이 농사를 짓던 곳이다. 화전민들은 해마다 불을 놓아 잡목을 태우며 농사를 지었고, 주 능선 일대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것이 나무가 없다는 의미 그대로의 '민둥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이다. 

화전이 금지되고 산림녹화사업이 벌어졌지만, 바람이 거세고 자연 산불이 잦은 민둥산 산머리에는 나무를 심을 수 없었다. 대신 참억새가 무성하게 자랐다. 이리하여 지금은 가을 햇살과 바람에 은빛으로 출렁이는 억새밭으로 변신했다. 가을 단풍이 화려하다면 부드러운 능선 위의 억새밭은 그윽하다.

올 10월은 날씨가 가을답지 않게 덥고 비가 오는 날도 잦았다. 지난 주말에 예정된 민둥산 산행 역시 비 소식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다행히 새벽에 오던 비가 그치고 날이 갰으나 하늘에는 구름이 많아 햇살에 반짝이는 억새는 보기 힘들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민둥산 산행은 일반적으로 증산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한다. 푹신한 흙길로 이루어졌지만 처음부터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조금 걷다 보니 급경사와 완경사로 나누어지는 이정표를 만났다. 산길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으니 완경사로 방향을 정했다. 
 
임도를 둘러싼 나무에 가을 색이 올라오고 있다
▲ 주막까지 차로 올라올 수 있는 임도 임도를 둘러싼 나무에 가을 색이 올라오고 있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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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경사의 기준은 일반적인 기준과 달랐다. 강원도의 자존심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는지. 계속되는 오르막에 다리 힘이 달리는 듯할 때 주막이 나타났고 주막 한쪽으로는 임도도 보였다.

주막에서 감자전으로 속을 채우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발이 뒤로 밀리며 스틱 없이는 올라가기 힘든 길이 계속됐다. 젖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아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빠 손에 이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젠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들렸다.
 
억새밭 사이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민둥산 정상이 보인다.
▲ 멀리 보이는 민둥산 정상 억새밭 사이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민둥산 정상이 보인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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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억새 사이로 보이는 푸른빛 산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민둥산 능선에서의 서쪽 전경 출렁이는 억새 사이로 보이는 푸른빛 산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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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틱으로 진흙땅을 찍으며 간신히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나무들 대신 양옆이 억새로 가득한 계단길이 나왔다. 드디어 억새구나. 갑자기 기운이 나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뛰다시피 올라가니 시야가 확 트이고 억새로 이루어진 평원 위를 걷고 있었다. 앞에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정상이 보이고 양옆은 출렁이는 억새 사이로 보이는 푸른빛 산맥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억새를 빛내줄 햇살이 아쉬웠다.

돌리네, 백록담을 걷는 기분 
 
정상석 뒤에 ‘나도 있어요’라고 소곤거리듯 자그마한 표지석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 정상의 꼬마 표지석 정상석 뒤에 ‘나도 있어요’라고 소곤거리듯 자그마한 표지석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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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흥분한 등산객들로 몹시 붐볐다. 사진을 남기기 위한 긴 줄이 있는 정상석 뒤에 '나도 있어요'라고 소곤거리듯 자그마한 표지석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 뒤쪽 아래 멀리 화산구처럼 푹 꺼진 곳에 녹색의 우물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돌리네(doline)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민둥산에는 빗물에 쉽게 녹아내리는 석회암의 특성 때문에 움푹움푹 꺼진 지형이 열두 개나 있다는데, 정상에서 보이는 잘 차려진 돌리네를 보고는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리네를 중심으로 편안한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둘레길 사 분의 삼 정도 되는 지점에 이르면 돌리네로 직접 내려가는 길도 있었다. 마치 30여 년 전 백록담 주위를 걷는 기분으로 돌리네를 크게 그리고 작게 한 바퀴씩 돌았다. 
 
푹 꺼진 것이 화산구같다. 돌리네 둘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 정상에서 보이는 돌리네 푹 꺼진 것이 화산구같다. 돌리네 둘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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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연못같다. 물이 맑아 거울처럼 억새를 비춘다
▲ 가까이에서 본 돌리네 큰 연못같다. 물이 맑아 거울처럼 억새를 비춘다
ⓒ 백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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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온 길이 미끄러운 진흙 길이었으니 내려가는 길 또한 진흙 길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억새에 돌리네에 취해 그만 잊었나 보다. 임도를 마다하고 등산로를 택하니 내리막길은 미끄러운 정도가 차원이 달랐다. 미끄러지고 구르기도 하면서 스틱에 의지해 어찌어찌 걷다 보니 다시 임도를 만나고 지리한 임도를 따라 민둥산 등반을 마무리했다.

민둥산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겨울 정선을 지나가다 민둥산이란 표지판을 보며 '어떻게 산 이름이 민둥산이지?' 하며 의문을 나타냈다. 그 후 산 정상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라 불리게 된 내력을 알고는 가을에 꼭 와보고 싶었다.

그리고 산머리를 은빛 억새로 채운 민둥산을 직접 체험했다. 한때 배고픔으로 일구었던 산꼭대기 산나물 밭이 이제는 가을의 명소로 변모했다. 사람의 삶이 변하니 자연의 역할도 변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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