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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군수가 충청남도경찰국에 요청해, 답신된 신원조사 회보서
 아산군수가 충청남도경찰국에 요청해, 답신된 신원조사 회보서
ⓒ 맹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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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어느날. 맹억호(1949년생)는 우연히 사무실 책상 위 문서철을 보게 됐다. <인사기록카드>. 생각 없이 한 장씩 넘기던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기 이름이 적힌 카드가 나왔기 때문이다. 1974년 작성된 '신원조사 회보서'는 아산군수가 충청남도 경찰국에 신청한 '신원조사 요청에 대한 답변서'였다. 답변서를 읽는 맹억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다가 문서 하단에 쓰인 '기타' 란을 보고는 화가 치솟았다.

"맹억호의 부 맹갑재는 리임위(마을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타(활약하다가) 9.28 수복 당시 처단된 자임."

아버지가 부역죄로 처단?

충청남도 경찰국은 맹억호의 아버지가 6.25 때 충남 아산군 배방면 휴대리 인민위원장을 했기에 수복 시에 군·경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기록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아버지의 과거 행위를 기록하고 자식을 감시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6.25가 발발한 지 40년이 되었고, 연좌제가 공식 폐지된 것도 10년이 지났건만 경찰과 행정기관은 연좌제의 불법 기록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답변서에는 충청남도 경찰국이 공무원 맹억호를 주시(감시)한 결과 사상적 측면에서 '용의점을 발견치 못함', 성질·소행은 '온순·단정'하다고 적었다. 맹억호는 자신이 '빨갱이 자식'으로 수십 년간 감시당했다고 생각하니, 대낮에 대로변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맹억호의 아버지 맹갑재는 죽을 만큼 부역죄를 지었는가? 또 1950년 9, 10월경에 부역죄로 처형됐을까?

해방 후 천안제3초등학교(현 천안 남산초) 교사였던 맹갑재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교사 일을 계속했다. 천안에 진주한 인민군은 교사들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가르치게 하고 인공기를 그리게 했다. 교사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후 국군이 수복하고 인민군이 물러가자 누군가가 맹갑재가 부역을 했다고 밀고했다. 맹씨는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앞장섰다는 혐의로 아산군 배방지서에 연행됐다. 인민군의 강요로 80일도 안 되는 기간에 인민학교(초등학교) 교사 일을 한 게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됐다. 1950년 12월 말경 맹갑재는 배방지서 유치장에 2일간 구금되었다가 온양경찰서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달 후 맹갑재는 무죄 석방됐다.

그런데 맹갑재가 집에 도착하니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가족의 몰살. 아버지, 어머니, 아내, 동생, 제수씨 등 10명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 죽은 아내는 만삭이었다. 맹갑재의 가족이라고는 동생 맹웅재(1939년생)와 아들 맹억호(1949년생)뿐이었다. 나머지 가족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12살인데요"
 
가족이 몰살된 성재산 입구에 선 맹억호
 가족이 몰살된 성재산 입구에 선 맹억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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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에서 열 살 아래 아이들 한 명씩만 살려 주겠다." 캄캄한 창고 안에서 들려오는 말에 맹무섭(1904년생, 맹갑재의 부친)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과 같이 갇힌 아들 웅재는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남 맹갑재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가 소식이 없고, 장손 억호는 연행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살아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창고에 끌려온 아들을 살려야 했다. "너 아홉 살이라고 해라." "나는 열두 살인데요?" "이 놈의 자식. 나가라면 나가지 웬 말이 많어." 맹무섭은 아들 맹웅재의 엉덩이를 발로 힘껏 찼다. 영문을 모르는 열두 살 웅재는 맞은 게 서러워 엉엉 울면서 곡물창고에서 나왔다. 그날 밤 곡물창고에 남아있던 맹무섭 일가 10명은 성재산 방공호에서 모두 학살당했다. 맹씨 가족 외에도 300여명의 사람이 세상을 하직했다. 1951년 1월 6일이었다.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나온 비녀. 희생자가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나온 비녀. 희생자가 여성임을 알 수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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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아산군에서는 '부역 혐의'로 민간인 800~2000여 명이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노인, 여성을 포함해 아기까지 대살(代殺, 대신 죽임)이 횡행했다. 시신 대부분은 수습하지 못했다. 지난 2018년 아산시 설화산에서 208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80~90%가 여성으로 추정된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군·경이 수복한 후 충남 아산군 배방면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경찰과 향토방위대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부역자를 잡아들였다. 휴대리 맹태섭과 맹경재도 배방면 향토방위대 부위원장 김민식(가명)에 의해 연행됐다. 각각 인공 때 휴대리 인민위원장을 지내고 배방면 인민위원회(면사무소)에 근무했다는 죄목이었다.

한 집안이었던 이들이 연행되자 맹무섭은 마을사람들에게 연판장을 돌려 아들의 무죄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받았다. 그는 진정서를 배방면사무소와 아산경찰서에 보냈다. 하지만 맹무섭의 장남 갑재는 부역 혐의로 연행됐고 이어 맹무섭 일가 10명은 배방면사무소 곡물창고에 구금됐다.

그들은 맹억호의 할아버지 맹무섭, 할머니 조중희(1903년생), 임신 만삭의 어머니 이규옥(1923년생)과 숙부, 숙모, 고모 등과 삼촌 맹복재, 누나 맹만호(1946년생)였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있던 삼촌 맹복재는 맹억호보다 4개월 늦은 1949년 6월생이었다. 다행히 막내 맹억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이규옥이 어린 억호를 데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앙앙." "아가. 울지 마라!" 엄마 이규옥은 안달이 났다. 만삭인 그녀는 경찰 소집에 길을 나서야 하는데 막내 억호가 밥투정에다 울어대 정신이 없었다. 포대기에 업은 억호가 계속 울어대자 이규옥은 작은어머니 댁에 아기를 맡겼다. "작은어머니, 야 좀 부탁해유" "알았다. 얼릉 가 봐라." 그렇게 간 이규옥을 시부모 등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아기 맹억호는 밥투정 때문에 죽음의 구렁텅이에 끌려가지 않았다.

울화병으로 세상 등진 아버지

살아남은 맹갑재·맹억호 부자의 앞날은 험난했다. 

맹갑재는 부역혐의자 처벌을 피해 천안 광덕면, 풍세면 등으로 피신을 다녀야 했다. 그는 유난히 추웠던 1951년 1, 2월을 천안 태학산 아래 바위굴에서 죽지 못해 살았다. 세상이 잠잠해지자 하산을 한 맹갑재는 다행히 초등학교 교사로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맹갑재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 컸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고, 먹을 것이 입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가슴의 한을 풀지 못하고, 울화병으로 1951년 7월 3일 세상을 하직했다.

아버지 맹갑재마저도 죽자 맹억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는 천안의 작은할아버지 집에 보내졌다. 천덕꾸러기가 된 억호는 작은할아버지를 따라 밭에 가면 방치되기 일쑤였다. 그는 고랑에서 뒹굴기도 하고, 흙을 한 주먹 먹기도 했다. 밭고랑에서 뒹굴어 흙범벅이 된 그를 사돈댁에 들렀던 외할아버지가 목격했다.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는 억호를 데려왔다. 맹억호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외가에서 살았다. 그런데 학교 입학을 앞두고 외할아버지가 "너는 맹씨 씨니까 네 작은할아버지한테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맹억호는 다시 작은할아버지 댁에 보내졌다. 하지만 작은할아버지는 아이를 상급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신현익 교장이 집에 와 "아이를 상급학교에 보내 주세요"라고 사정해 겨우 천안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 맹억호는 천안중학교를 거쳐 천안농고에 다녔는데, 하루라도 맘 편히 책보를 싸는 날이 없었다. 농번기에는 지각하는 일이 잦았다. 작은할아버지는 한여름에는 새벽 4시에 억호를 깨웠다. 3~4시간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학교에 가면 오전 내내 졸기 바빴다. 

고려대학교 법학과 나와 평생을 사무장으로

우여곡절 끝에 천안농고를 졸업한 맹억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 1969년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아산군 배방면사무소, 온양읍사무소, 온양시를 거쳐 통합아산시에 근무했다. 그는 아산시의회 사무국장을 끝으로 2009년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신원조사 회보서를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12살인데 9살로 나이를 속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맹웅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천안중, 천안농고 6년 동안 수석을 했고,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연좌제에 걸려 ROTC(학군단)에서 퇴교 당했다. 결국 사법고시의 길을 포기하고 서울 덕수궁에 있는 사법서사 사무실에서 평생을 사무장으로 근무했다.

아산유족회 회장 맹억호(73세, 충남 아산시 용화동)는 "국가 차원의 철저한 진실규명을 통한 명예회복이 되어야 한다. 아산시에서 진행하다 중단된 유해발굴도 제2기 진실화해위회가 재개했으면 한다. 억울한 죽음도 죽음이지만, 부모형제의 시신을 못 찾은 가족들의 한은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맹억호 회장은 "위령공원 조성을 통해 유족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시민들의 인권교육의 공간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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