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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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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5ㆍ17 쿠데타 이후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던 야권인사들이 해금과 함께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84년 12월 2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갖고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열었다. 민추협 인사들과 해금된 구신민당 인사들, 각계 민주인사들로 구성된 창당발기인들은 발기취지문을 통해 문민정치 확립을 내걸고, △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제도개혁 △ 정치활동규제법 폐지와 전면해금 △ 2ㆍ12 총선승리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민당의 총재에는 양 김씨의 합의로 이민우가 추대되고, 부총재는 김녹영ㆍ이기택ㆍ조연하ㆍ김수한ㆍ노승환씨 등 5명을 선출했다. 신민당은 창당선언문에서 "민주화의 열망과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 민족의 주체세력으로 모든 반민주적 세력과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 대통령 중심제와 대통령직선제 △ 일체의 독재와 독선배제 △ 지방자치제 조기실시 △ 언론기본법 폐기 △ 군의 정치적 엄정중립 등을 정강정책으로 채택했다.

신민당 창당과정에서 특정 인사들의 참여문제를 두고 내부 논란이 일었다.

"당시 신민당을 창당하면서 이철승 등이 또 다시 참여하는 것을 보고 상위에서 강력히 반대하며 뒷날 크게 후회할 것을 경고했으나 김상현ㆍ조연하 위원 등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그대로 창당되었습니다."(윤혁표) 라는 증언도 있다. 실제로 신민당은 이후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노선투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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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총선은 신민당의 돌풍현상이었다. 12ㆍ12 쿠데타 이후 폭압통치와 실정으로 민심은 이미 5공정권을 떠나 있었고, 제1야당의 위치에 있던 민한당도 선거를 앞두고 조윤형, 정대철 등 8명의 현역 의원이 탈당하여 민추협에 이어 신민당에 참여하고, 신사당에서도 김동주ㆍ백찬기 의원이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대세는 이미 판가름난 상태였다. 여기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민추협 고문의 사선을 뚫은 귀국강행은 국민에게 새로운 민주화의 희망과 꿈에 부풀어 투표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급조된 신민당은 창당 28일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지역구 50석을 확보하고 전국구에서 17석을 당선시켜 모두 67명의 의석을 차지하고, 서울에서는 42.7%의 득표율로 민정당 27.7%보다 15.7%를 더 앞섰으며, 서울 14개 선거구에서 전원 당선 및 12개 지역 1위 당선의 성과를 올렸다. 부산ㆍ인천ㆍ광주 등 대도시에서도 압승했다. 신민당의 압승, 민한당의 궤멸, 민정당의 부진이었다. 

민추협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3월 15일 창천동 김상현씨 집에서 김대중ㆍ김영삼ㆍ김상현이 회동하여 김대중의 공동의장 문제 등을 논의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공동의장을 맡고 김상현은 부의장, 최형우가 간사장을 맡기로 합의했다. 고문에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추대되었다. 이로써 민추협은 그동안 동교동의 김상현 대행체제가 종식되고 명실상부한 양김 체제로 전환하였다. 민추협은 정통야당세력을 대표하는 두 공동대표에 의해 이끌어졌다. 
 
12대 총선 선거 결과. (위키피디아 갈무리)
 12대 총선 선거 결과. (위키피디아 갈무리)
ⓒ 위키피디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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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서 예상 외의 승리를 거두고 두 김씨가 공동대표를 맡게 된 제2기가 민추협으로서는 가장 활기넘친 전성시대였다. 제2기 출범을 계기로 전국에 시도지부를 결성키로 하고, 60여 명이던 운영위원도 250여 명으로 늘리고, 회원 총수도 1,50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힘의 추는 서서히 원내 기반이 있는 신민당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민추협의 두 공동의장은 총선 후 신민당을 방문하여 당선자들을 격려하고 이민우 총재와 3자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향후 정국 운영과 개헌추진방향 등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2ㆍ12총선 뒤 첫 3ㆍ1절 66주년을 맞아 두 공동대표는 "현 정권당국이나 집권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고 겸허하게 수렴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고 말하고 "우리는 앞으로 재야 민주역량과 국민ㆍ학생과 노동자ㆍ농민의 민주적 창의를 하나로 집결하는데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라고 결속과 투쟁을 다짐했다.

1985년 5월 24일 서울시내 5개 대학생 75명이 서울 을지로입구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2층 도서관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에 미국이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두 공동의장은 긴급회동을 갖고 학생들의 주장이 국민의 요구와 같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미우호와 민족적 자존심이 해쳐지지 않도록 신속하고 평화적으로 수습되도록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민추협은 변호인단을 구성하는 등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정부는 이해 8월 학원안정법 시안을 발표하여 학원탄압을 강화시키려 했다. 학생들은 물론 민추협ㆍ신민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전두환 정권은 더욱 강압적으로 나왔다. 학생시위가 계속되고 노동자들의 분신사태가 잇따랐다. 8월에는 광주에서 홍기일, 10월에는 송광영씨가 분신하여 치료 중 사망했다. 고려대학에서 개최된 전학련 주최 범국민시국대토론회의 방문과 관련하여 박찬종ㆍ김병오ㆍ한광옥 의원 등 민추협 간부 7명이 검찰조사를 받고 불구속 기소되고, 박찬종 의원은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했다.

기관지 <민주통신>의 제작 관계자들이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기도 했다. 김근태 등 민주인사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용공조작 사실이 밝혀지면서 민추협은 신민당ㆍ재야ㆍ종교계와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농성을 벌였다. 

신민당은 8월 2일 임시전당대회를 소집하여 주류가 미는 이민우 후보와 비주류의 김재광 후보가 맞붙어 471표 대 354표로 이총재가 재선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평화민주당, #평민당, #평화민주당연구, #민추협, #미문화원점거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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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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