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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문제는 현재 사회의 현안으로 부각되어 있다. 필자는 지난 10월 11일 민형배 국회의원실로부터 귀중한 자료 하나를 입수하였다. 자료에는 최근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검토한 회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는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는 위원회이다. 지난 6월 25일 1심 위원회의와 9월 9일 2심(최종심) 위원회의를 가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포상검토 자료, 반대 의견 보니

자료에는 1심 위원회의와 2심 위원회의에서 나온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찬반 의견을 게재하고 있었다. 1심 위원회의는 17명이 참석하였고, 2심 위원회의는 9명이 참석하였다. 서훈 반대가 각각 서훈 찬성보다 많았다.

자료에는 서훈을 반대한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6개 게재하고 있었는데, 필자가 여러 번을 읽었으나 반대의견 내용이 2차 동학농민혁명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하나도 타당하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한국독립운동 전공 역사학자로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로서, 심사위원들의 6개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하나하나 논박하고자 한다.

첫째, 이들은 "독립운동은 식민상태 또는 준식민상태에서 국권의 수호 또는 회복하기 위한 활동으로 항일운동이 곧 독립운동은 아님"(3쪽)이라는 의견을 냈다.

독립운동은 "식민상태 또는 준식민상태에서 국권의 수호 또는 회복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의견은 독립운동사 전공자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다. 심사위원들이 1962년부터 2020년까지 줄기차게 을미의병 참여자 120명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온 역사가 있다. 을미의병은 항일운동이어서 서훈하였는가? 아니면 독립운동이어서 서훈하였는가?

2차 동학농민혁명(1894)과 을미의병(1895)은 똑같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똑같은 항일무장투쟁인데, 을미의병은 서훈했다. 잘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서훈 조치를 하지 않는가? 이는 형평성과 공정성에 지극히 반한 것이었다. 서훈에서는 같은 잣대를 대야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호송되는 전봉준(좌측 세 번째), 그가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힌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호송되는 전봉준(좌측 세 번째), 그가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힌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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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동학농민운동 2차봉기 시 항일투쟁에서 지키고자 했던 목표와 독립유공자가 지키고자 했던 목표가 다름"(3쪽)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 반대의견은 궤변, 즉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동학농민명예회복법'(2004)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전후, 역사학자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만들어진 법률이다. '동학농민명예회복법'(2004) 제2조(정의)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 참여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독립유공자법'(1994)에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를 순국선열로 규정하고 있다. 순국선열을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독립유공자법'의 "독립유공자"에 해당한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국권수호운동,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점에서 그 목표가 같다.

결국 요약하면, 이 반대의견은 '독립유공자법'과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의견일 뿐이다.

셋째, "동학은 체제개혁을 위해 봉기,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병과도 성격이 달라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려움"(3쪽)이라는 의견을 냈다. 

을미의병은 되고, 동학농민혁명은 안 된다?  

이 반대 의견도 궤변이라고 본다.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은 노선이 다르다. 성격도 다르다. 그런데 다른 것이 서훈에 있어서 뭐가 문제가 되는가? 서훈에 있어서 근왕주의자, 복벽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냐를 따지는가? '항일순국'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서훈해온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체제개혁을 위해서만 봉기했는가? 2차 동학농민혁명의 항일무장투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병운동에서도 반봉건 운동의 성격이 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을미의병의 항일무장투쟁은 높게 보아 심사위원들이 꾸준히 서훈을 해오면서도, 같은 시기 2차 동학농민혁명의 항일무장투쟁은 눈감고 있는가? 형평성에 반한다. 을미의병은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보고, 항일무장투쟁인 2차 동학농민혁명은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넷째, "동학 2차봉기가 반일투쟁은 맞으나, 동시에 반봉건 투쟁도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반침략적 성격으로만 볼 수 없음"(3쪽)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 반대 의견은 전형적인 궤변이다. 후기의병도 반봉건 투쟁이 있었던 탓이다. "동학 2차 봉기가 반일투쟁은 맞으나, 반침략적 성격으로만 볼 수 없다"는 의견은 자체 모순이다.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들은 '늦었다. 그러나 이제라도 동학 순국선열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를 바란다'라는 제목의 성명서(2021. 8. 5.)에서 "2차 봉기 참여자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음은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 의해 이미 입증되었다"라고 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또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반일항쟁의 시작점이며 민족적 대연합을 추구하였다. 2차 봉기에 임하는 농민군은 관료와 유생들에게 함께 항일무장투쟁의 전선에 합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한국근대사에서 규모면에서도 가장 큰 반일 무력항쟁이었다. 항일 내지 반일 투쟁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2차 동학농민혁명은 반일투쟁이고 반침략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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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 성명서에 참여한 고석규 전 목포대학교 총장은 "일본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킬 때부터 조선을 '보호국'화하고 궁극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세운 거다. 일본의 조선침략을 1894년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우리는 이 흐름 속에 나라를 잃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항거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일어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일항거의 시작점이다"라고 하면서, "이로 인해 무수한 희생도 있었다. 일제에 맞서 싸운 것이 독립운동이 아니라면 무엇이 독립운동이냐"라고 인터뷰에서 지적했다(관련 기사: "박정희·전두환, '동학혁명' 정치적 이용만... 이번엔 서훈돼야").

이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과 합리성이 있다고 필자는 본다.

다섯째, "학계는 국권침탈의 시기를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보고 있으며, 동학 2차봉기의 포상은 정부가 국권침탈의 시기를 10여 년이나 앞당기는 것을 공인하는 것"(4쪽)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 반대의견은 명백한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지금까지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전혀 모르고서 한 발언으로 보인다. 을사의병과 무관한 을미의병 참여자에게 120명을 포상하였다. 심사위원들이 을미의병 참여자를 지금까지 꾸준히 포상해 온 것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은 갑오변란 즉 1894년 6월의 경복궁 점령 사건에서도, 1895년 을미사변에서도 이루어졌다. 이것도 역사학계의 연구에 기반한 것이다.

"동학 2차봉기의 포상은 정부가 국권침탈의 시기를 10여 년이나 앞당기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라는 반대의견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을 반대하기 위한 궤변일 뿐이다. 이 반대의견은 심사위원들이 포상해온 을미의병 서훈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을미의병 서훈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분명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여섯째, "조선과 대한제국이 준식민지 상태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을 부정하는 것"(4쪽)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 반대의견도 궤변이다.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이 무슨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 강조하기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을 반대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에 일어난 을미의병 참여자의 서훈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이 나서서 서훈 회수 조치를 하던지 뭔가를 했어야 하지 아니한가? 왜 침묵하고 있는가?

대한제국 시기에 있었던 을사조약 체결은 이미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음을 반증한다. 일제가 자행한 을미사변이 국권침탈이어서, 이에 맞선 을미의병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였다. 1894년 일제의 경복궁 점령도 국권 침탈인 것이고, 1895년 일제의 경복궁 점령과 을미사변도 국권 침탈인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심사위원들이 을미의병 참여자를 2020년까지 서훈하였다. 2020년에 이면수(李勉洙, 1833∼1898)와 류인목(柳寅睦, 1839∼1900)은 을사의병과 무관한 을미의병 참여만으로 각각 건국포장에 서훈되었다. 이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나와 있는 사실이다. 아주 잘한 일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일제의 1895년 국권침탈(을미사변)은 주목하면서, 일제의 1894년 국권침탈(경복궁 점령사건)을 외면한 것은 형평성과 공정성에 반한 것이다.

서훈 신청은 왜 부결되었나

1977년에 손화중 후손이 신청한 서훈은 부결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서훈 신청도 부결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서훈 신청이 부결된 요인을 찾아내었다. 그 요인을 제시한다.

첫째, 공적심사위원회 심사위원(1심 30명, 2심 6명) 가운데에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가 단 한명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불공정한 심사위원 구성으로 보인다.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는 제1공적심사위원회와 제2공적심사위원회(최종심)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제1공적심사위원회는 1분과(의병, 3·1운동), 2분과(국내항일), 3분과(해외항일)로 나뉘어져 있다. 해당 전공분야의 역사학자들이 각자 자기 연구 분야의 항일운동과 관련된 인사를 심사하였다. 잘한 일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 교수가 전국에 20여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모순이 아닌가.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 교수를 심사위원으로 참여시키지 않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심사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도 역사학자지만, 개별 역사학자는 자기 전공 이외는 잘 모른다. 자기가 틀릴 수 있다.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학자는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

둘째, 이해충돌 분과가 2차 동학농민혁명 서훈 심사에 관여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1공적심사위원회 1분과(의병분과)에서 우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대해 심사를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항일 동학농민군 토벌대 출신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준 의병 전공 심사위원들이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에 관여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해충돌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해 충돌에 해당하는 의병 전공 심사위원들은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역사학자는 모순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서훈 문제 논의,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면

제1공적심사위원회에 별도 동학혁명분과를 만들어 이 문제를 논의하면 된다. 현재의 공적심사위원회의 인적구성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심사를 다루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해가 충돌하고 있는 제1공적심사위원회 1분과(의병분과)가 서훈 심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은 불공정하게 심사를 해서는 안 된다.

의병분과(1분과)에서 의병 전공 심사위원들이 의병참여자를 심사해서 서훈을 하였듯이, 제1공적심사위원회에 '동학혁명분과'를 만들어서 동학농민혁명 전공 심사위원들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심사해서 서훈 여부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제1공적심사위원회에 분과 하나를 더 만들면 된다. 이것이 공평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는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의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반대를 논박하였다. 필자의 주장과 의견이 다른 공적심사위원회 심사위원은 언론 매체를 통해 반론을 펴기를 바란다. 필자는 반론을 환영한다. 

덧붙이는 글 | 다른 매체에 송고한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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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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